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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사곡리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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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8회 작성일 13-03-06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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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증평군 증평읍 사곡2리
종 목 : 제143호
수량/면적 : 1기  

 

말세를 알리는 우물 증평시가지에서 충주 방면으로 1㎞ 쯤 가다 보면 미암교 앞에서 제방도로로 접어들어 사곡교에서 2㎞ 쯤 가다보면 증평읍 사곡2리 사청마을에 닿는다. 이 마을에는 한 우물이 남아 있는데,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조선 제7대 왕인 세조(世祖 : 1455∼1468)가 조카인 단종(端宗 : 1452∼1455 )을 폐하고 왕위를 빼앗은 후 계속되던 가뭄이 병자년(1456)여름에는 더욱 극성을 부려 사람이나 짐승들이 맥을 못추고 그늘을 찾아 다니는 어느 무더운 날이었다. 장삼(長衫)을 길게 늘어뜨린 한 노승이 지나다 물이 마시고 싶어 한 집에 들러 물을 청하니, 아낙네는 "집에 길어다 놓은 물이 없으니 툇마루에서 기다리시면 마실 물을 길어 오겠습니다." 노승이 마루에 걸터앉아 한참을 기다렸으나 아낙은 저녁 때가 다 돼서야 땀을 뻘뻘 흘리며 물동이를 이고 돌아와서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는 인사를 하고 공손히 물을 떠 올렸다. 노승은 물을 시원하게 마신 후 늦은 이유를 물었더니, 아낙은 20여리 떨어진 곳에 가서 물을 떠왔다고 했다. 그러자 노승이 아낙의 수고에 감사해 하더니 지팡이로 땅을 몇번 치고는 "허허, 이곳 땅은 층층이 암반이로다. 초목인들 제대로 자랄 수 있겠는가. 일찍이 선인들이 터를 잘못 잡았도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노승의 이 말에 아낙은 "어찌된 영문인지 물이 나지 않아 지금도 마을장정들이 우물을 파고 있습니다다만‥‥." 하고 한숨을 쉬었다. 노승은 한참을 생각하고는 사립문을 나서서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가 큰 고목(古木)옆에 다가서서 지팡이로 세 번 두드리고 청년들에게 그 자리를 파도록 하니 이곳 저곳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노승은 "자, 어서 파시오. 겨울이면 따뜻한 물이 솟을 것이고, 여름이면 찬 물을 얻을 것이오. 그리고 우물을 파기만 하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장마가 닥쳐도 물이 더 이상 늘지 않을 것이외다."라고 했다. 그러나 노승은 "넘치거나 줄어들지는 않지만 꼭 세 번 넘칠 날이 있으니 넘칠 때마다 나라에 큰 변이 일어날 것이오, 또 세 번째 우물이 넘치는 날에는 말세(末世)가 될 것이니 그때 이 마을을 떠나시오." 라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정신을 잃고 노승의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노승이 떠나고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반신반의했으나 우물을 파기로 결정했다. 이튿날 고목을 베어내고 땅을 파니 노승의 말대로 맑은 물이 솟아 오르자 주민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노승의 예언이 마음에 걸렸다. 세 번 넘치면 말세라. 이 말은 멀리 퍼져 인근 주민들에게도 우물의 수량에 큰 관심을 갖게 했는데, 어느 날 우물에 물을 길러간 한 아낙이 우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이 소문은 인근에도 퍼져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었는데 며칠 후 왜병이 쳐들어 왔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노승의 말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 정초에 우물이 처음으로 넘쳤다. 임진왜란을 예고했던 것이다. 두번째로 우물이 넘친 것은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던 경술국치 때의 일이었다. 그후 6·25 때는 우물이 지면 1m 내·외로 불어나 전쟁발생을 예고하기도 했다. 1947년 음력 2월에는 우물 하부의 석축이 우그러들어 재공사를 했고, 1979년에는 우물을 시멘트로 바꿔 간이 상ㅅ도로 사용했으나 마을에 액운이 잦아 원상복구했다. 1995년 11월에는 2∼3일간 우물이 불어났다 줄었다하기도 했고, 마을에서는 해마다 봄·가을 두 차례 물을 퍼내 청소를 하는 등 관리에 정성을 쏟고 있다. 1996년 5월, 마을 사람들은 유래비를 세우고 새로 정비해 우물이 세번째 넘치지 않기를 기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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