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의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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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읍

단군전과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3.1공원이 있는 고장

증평리 (曾坪里)

[ 연혁 ]

증평리는 본래 조선시대 청안현(淸安縣) 근서면(近西面) 지역이다.9)“장평”은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는 “裝坪”으로, 『朝鮮全道部窘面里洞名稱一覽』(1917)에는 “裝坪” 으로 나타난다.10) 증평군 내에 있는 지명을 조사하기 위해 마을별로 많은 분들의 협조를 받았다. 이 글은 그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뜻을 전한다. 11)『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보이는 “안합리”(安合理)는 『구한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안곡리(安谷里)”에 대한 오기(誤記)로 보인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의 기록에는 청안현 근서면에 29개리가 있었다. 그 중에서 현재의 증평리와 관련된 마을로는 삼성리(三省里)ㆍ내동상리(內洞上里)ㆍ내동하리(內洞下里)ㆍ평사리(平沙里)ㆍ증자천리(曾子川里) 등 5개리이다. 그 뒤 증평리는 건양(建陽) 원년(1895)에 청안현이 청안군(淸安郡)으로 승격되면서 청안군의 6개면인 읍내면(邑內面)ㆍ동면(東面)ㆍ남면(南面)ㆍ북면(北面)ㆍ서면(西面)ㆍ근서면(近西面) 중에서 근서면에 속하는 지역이 되었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 당시 청안군 근서면은 26개리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 사이 내동상리와 내동하리는 내상리(內上里)로 합쳐졌으며, 증자천리는 증천리(曾川里)로 바뀌었고, 장평리(莊坪里)와 안곡리(安谷里)가 새로 생겼다. 1914년에 일본제국주의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증평면(曾坪面)은 11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따르면, 증평리는 근서면의 장평리(壯坪里)ㆍ삼성리(三省里)ㆍ안합리(安合里)ㆍ내상리(內上里)ㆍ평사리(平沙里)ㆍ증천리(曾川里) 일부와 남면의 금반리(金盤里)ㆍ둔덕리(屯德里) 일부와 청주군(淸州郡) 산외이면(山外二面)의 초중리(楚中里) 일부를 병합하여 만들었다. 이때 증천리(曾川里)와 장평리(壯坪里)의 이름을 따서 증평리(曾坪里)라 하고, 괴산군(槐山郡) 증평면(曾坪面)에 편입하였다. 증평리는 당시 증평면의 소재지가 되었다. 1949년 8월 13일에 대통령령 제156호에 의하여 증평면이 읍(邑)으로 승격되어 괴산군 증평읍(曾坪邑) 증평리가 되었다. 증평리는 1966년 1월 1일에 교동리(校洞里)ㆍ중동리(中洞里)ㆍ대동리(大洞里)로 분리되었고, 다시 2002년 1월 2일에 창동리(昌洞里)ㆍ장동리(莊洞里)ㆍ증천리(曾川里)ㆍ내성리(內省里)ㆍ신동리(新洞里)로 분리되었다. 이때 대동(大洞) 5개리 중 2ㆍ3ㆍ4리를 증평리로 하였다. 1990년 12월 31일에 지방자치법 제106조 및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괴산군 증평읍에서 충청북도증평출장소(忠淸北道曾坪出張所)로 바뀔 때, 증평리는 증천지소(曾川支所) 관할이었다.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증평읍 증평리가 되었다.

[ 유래 ]

증평리(曾坪里)는 1914년에 증천리(曾川里)와 장평리(壯坪里)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증평리에는 증평초등학교ㆍ단군전ㆍ삼일공원 등이 자리하고 있다. 2010년 5월 현재 794세대에 2,055명이 거주하고 있다. 증평리의 어원이 된 증천리(曾川里)와 장평리(莊坪里, 壯坪里)에 대해서는 해당 법정마을 설명을 참고하기 바란다.

  • 증평1리(曾坪一里) : 증평1리는 증평리 중 서쪽에 있으며, 동진아파트와 개인주택단지로 되어 있다.
  • 증평2리(曾坪二里) : 증평2리는 증평리 중 동쪽에 있으며, 그린빌라ㆍ제일맨션ㆍ성호빌라ㆍ경일주택ㆍ대원빌라ㆍ미혁빌라와 개인주택단지로 되어 있다. 모두 318세대이며, ‘삼일공원’이 있다.빨간산(-山) : 현재 ‘증평장로교회’ 부근에 있던 나지막한 언덕이다. ‘빨간산’은 ‘빨간’과 ‘산’으로 나뉘며, ‘빨갛게 보이는 산’을 뜻한다. 빨갛게 보이는 이유는 흙 색깔 때문일 수도 있고, 나무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곳은 ‘성호빌라’ 뒤편으로, 실제로 흙이 빨갛다.
  • 증평3리(曾坪三里) : 증평3리는 증평리 중 남쪽에 있으며, 대동연립과 개인주택단지로 되어 있다.

[ 문화재 ]

단군전(檀君殿) : 증평1리에 있는, 국조 단군을 모시는 사당(祠堂)이다. 단군전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과 경천숭조사상(敬天崇祖思想)을 길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 건립되었다. 1929년에 일제는 이곳에 일본 신사(神祠)를 세웠으나, 1945년 8월 16일 광복 이튿날에 청년들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1948년 5월 27일에 김기석(金基錫: 1897~1978) 씨 등 증평 지역의 유지들이 그 자리에 단군전을 건립하였다. 단군전은 정면 3칸ㆍ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본전과 담장을 세워 건립되었다. 편액은 서봉(西峰) 김사달(金思達: 1924~1984)이 썼다. 단군의 영정은 가로 0.42mㆍ세로 0.82m의 크기로, 평정건(平頂巾)에 흰 옷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제향과 관리를 위해 1953년에 ‘단군전봉찬회(檀君殿奉讚會)’를 설립해 해마다 10월 3일 개천절과 음력 3월 15일 어천절(御天節: 단군이 승천한 날)에 제향하고 있다. 단군기원은 단군조선을 개국한 왕검(王儉)의 즉위년을 기원으로 한 연호(年號)로, 현재 쓰고 있는 단기의 기원은 『동국통감(東國通鑑)』(성종 15년, 1484)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즉 중국 요(堯) 임금 25년(무진년, B.C. 2333) 10월 3일에 단군이 태백산[백두산]에서 단군조선을 건국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단군전은 2004년 4월 30일에 증평군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