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의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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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읍

민중의 삶에 뿌리를 내린 미륵신앙

미암리 (彌岩里)

[ 연혁 ]

미암리(彌岩里)는 본래 조선시대 때 청안현(淸安縣) 근서면(近西面) 지역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 기록에는 청안현 근서면에 29개리가 있었다. 그 중에서 현재의 미암리와 관련된 마을로는 시화상리(時化上里)ㆍ시화하리(時化下里)ㆍ단암상리(丹巖上里)ㆍ단암하리(丹巖下里)ㆍ선원리(仙院里)ㆍ미륵리(彌勒里)ㆍ평사리(平沙里)ㆍ서당리(書堂里)와 북면(北面)의 대자랑리(大自郞里) 등 9개리가 있었다. 그 뒤 미암리는 건양(建陽) 원년(1895)에 청안현(靑安縣)이 청안군(靑安郡)으로 승격되면서 청안군의 6개면인 읍내면(邑內面)ㆍ동면(東面)ㆍ남면(南面)ㆍ북면(北面)ㆍ서면(西面)ㆍ근서면(根西面) 중에서 근서면(近西面)에 속하는 지역이 되었다.『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 당시 청안군 근서면은 26개리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 사이 평사리(平沙里)가 상평사리(上平沙里)와 하평사리(下平沙里)로 나뉘었고, 시화상리(時化上里)와 시화하리(時化下里)가 시화리(時化里)로, 단암상리(丹巖上里)와 단암하리(丹巖下里)가 단암리(丹岩里)로 합쳐졌다. 또한 선원리(仙院里)는 선원리(仙源里)로, 대자랑리(大自郞里)는 자양리(紫陽里)로 변경됐으며, 서당리(書堂里)가 없어지고 도안리(道安里)가 생겼다.1914년에 일본제국주의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증평면(曾坪面)은 11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따르면, 미암리는 근서면 시화리(時化里)ㆍ단암리(丹岩里)ㆍ선원리(仙源里)ㆍ미륵리(彌勒里)ㆍ평사리(平沙里)ㆍ명암리(鳴岩里)의 각 일부 및 같은 군 북면(北面)의 자양리(紫陽里)ㆍ도안리(道安里)를 병합하여 만들었다. 이때 미륵리와 단암리의 이름을 따서 미암리라 하고, 괴산군 증평면에 편입하였다.1990년 12월 31일에 지방자치법 제106조 및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괴산군 증평읍에서 충청북도증평출장소(忠淸北道曾坪出張所)로 바뀔 때, 초중리는 장평지소(莊坪支所) 관할이었다.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증평읍 미암리가 되었다.

[ 유래 ]

미암리는 1914년에 미륵리와 단암리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미암리는 증평읍사무소에서 증평대교를 건너 오른쪽에 바라보이는 마을로, 34번국도와 510번지방도ㆍ2번군도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더구나 최근 증평일반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이 일대는 새롭게 변모하고 있다. 조선시대 시화역(時化驛)이 있었고 옛 도안현청이 자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은 옛 영화를 되찾아가는 양상이다. 2010년 5월 현재 275세대에 642명이 거주하고 있다.

  • 미암1리(彌岩一里) : ㆍ미륵댕이[彌勒堂-] : ‘미륵댕이’는 증평읍사무소에서 증평대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1.3km 거리에 있는 마을이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미륵(彌勒)’으로 불리던 곳이다. ‘미륵댕이’는 ‘미륵당이’의 이모음역행동화 어형이고, ‘미륵당이’는 ‘미륵당’에 접미사 ‘이’가 붙은 어형이다. 따라서 ‘미륵댕이’는 ‘미륵당이 있는 곳’으로 풀이된다. 이 마을은 미암리의 으뜸 마을로, 미암리사지석조관음보살입상[달리 ‘미륵’으로도 부른다.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98호]이 있다. 이 때문에 붙은 이름이 ‘미륵댕이’이다. 오늘날에는 미륵사(彌勒寺)를 건립해 미륵을 관리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미륵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 미륵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예전에 마을에 염병[돌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렇다 할 약도 없었던 터라, 마을 사람들은 당시 마을에 있던 서낭나무를 대상으로 치성을 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마을 사람들이 서낭나무에서 치성을 드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이곳에 돌부처를 세우면 마을 사람들의 병이 나을 것이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십시일반으로 정성을 모아 돌부처를 세웠다. 이후로 더 이상 염병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 사람이 없었다. 미륵댕이골[彌勒堂-] : 미암리사지석조관음보살입상이 있는 골짜기이다. ‘미륵댕이골’은 ‘미륵댕이’와 ‘골’로 나뉘며, ‘미륵댕이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미암들(彌岩-) : 송산2리 ‘안자산1’[마을]과 미암1리 ‘미륵댕이’의 경계에 있는 들이다. 이 들 중 미암1리 ‘미륵댕이’ 앞[동남쪽]에 있는 들로, 보강천과 접해 있다. ‘미암들’은 ‘미암’과 ‘들’로 나뉘며, ‘미암리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수반쟁이들[-亭-] : ‘미륵댕이’ 북쪽으로 ‘미암리공동묘지’로 가는 길목에 있던 들이다. 자양천 동쪽으로는 ‘증평일반산업단지’ 지역에 포함되었다. ‘수반쟁이들’은 ‘수반쟁이’와 ‘들’로 나뉘며, ‘수반쟁이’는 ‘수반쟁’에 접미사 ‘이’가 붙은 어형이다. ‘수반쟁’은 ‘숲안정(-亭)’의 변화형이니, ‘수반쟁이들’은 ‘숲 안 정자가 있는 들’로 풀이된다.
  • 미암2리(彌岩二里) : ㆍ시화(時化)/수애(水涯)/수예/역촌(驛村) : 미암5리 ‘단지바위’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시화역은 고을 서쪽 17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청안군읍지(淸安郡邑誌)』에는 “시화역은 고을 서쪽 17리로, 율봉역(栗峯驛)에 속했다.”고 적고 있다. 『청안현지도(淸安縣地圖)』(1895~1909년)에는 ‘수애(水涯)’라고 표기되어 있기도 하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시화(時化)’로 불리던 곳이다.『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時化驛’이 기록되어 있다. ‘시화’는 시화역(時化驛)이 있던 마을로, ‘시화(時化)’는 ‘때때로 변한다.’는 뜻이다. 마을 동쪽에 이성산성(二城山城)이 있으며, 주변의 경작지에 고려시대의 기와편 및 자기편 등이 산포되어 있다. ‘수애’나 ‘수예’는 ‘시화’가 와전되면서 불린 이름이다. 달리 ‘역촌’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역이 있는 마을’을 뜻한다. 역원제도(驛院制度)는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의 전달 및 변방(邊方)의 중요한 군사 정보, 그리고 사신(使臣) 왕래에 따른 영송(迎送)과 접대 등을 위하여 마련된 교통 통신의 하나로,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설치된 제도이다. 관골(館-) : ‘시화’ 동남쪽, 이성산 방향에 있던 골짜기이다. ‘증평일반산업단지’ 지역에 포함되었다. ‘관골’은 ‘관’과 ‘골’로 나뉘며, ‘관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관’은 ‘조선시대에 관원이 공무로 다닐 때에 숙식을 제공하고 빈객(賓客)을 접대하기 위하여 각 주(州)와 현(縣)에 둔 객사’를 말한다. 시화역사(時化驛舍)가 있어 붙은 이름으로 추정된다. 새기들 : ‘시화’ 남쪽에 있던 들이다. ‘증평일반산업단지’ 지역에 포함되었다. ‘새기들’은 ‘새기’와 ‘들’로 나뉜다. ‘새기’는 ‘새기바위’와 ‘새기배미’ㆍ‘새기터’ 등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새기바위’에서는 ‘석이(石耳)가 나는 바위’로 풀이되고, ‘새기배미’ㆍ‘새기터’ 등에서는 ‘세 귀가 난 논배미나 터’로 풀이된다. 본 예도 ‘세귀들’로 보아, ‘세 귀가 난 들’로 풀이할 수 있겠다.
  • 미암3리(彌岩三里) : ㆍ재평골(-坪-)/상평(上坪) : ‘미륵댕이’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상평사(上坪沙)’으로 불리던 곳이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上平沙/?평골’로 기록되어 있다. ‘재평골’은 ‘재평’과 ‘골’로, ‘재평’은 다시 ‘재’와 ‘평’으로 나뉜다. ‘재’는 ‘고개’요, ‘평’은 들이니, ‘재평골’은 ‘높은 들에 있는 마을’로 풀이된다. 달리 ‘상평’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음바리 위쪽에 있는 마을’로 풀이된다. 까치고개 : ‘재평골’ 북쪽에 있는 고개로, 화성6리ㆍ화성7리로 갈 때 넘었다. 예전에는 성황당이 있어 주민들의 기도처였다. 성황당은 새마을운동으로 헐리고, 현재 화성리 쪽은 포장농로가 되었다. ‘까치고개’는 ‘까치’와 ‘고개’로 나뉜다. ‘까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까치’를 ‘아치[小]’의 변화형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때 ‘아치’는 ‘작은’의 뜻이다. 이 견해는 지명의 전부요소로 등장하는 ‘까치’ 중에는 ‘아치’로부터 변형된 것이 많다는 점에서 주장된 설이다. 그렇다면 ‘까치고개’는 '작은 고개'로 풀이된다. 다른 하나는 ‘까치’를 ‘가지[枝]’의 변형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때 ‘까치고개’는 ‘여러 방향으로 갈라지는 고개’로 풀이된다. 이 고개를 달리 ‘아치고개’로 부르는 점을 고려하면, ‘작은 고개’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까치개들 : ‘아치골개들’에서 34번국도를 건너 북쪽으로 ‘까치고개’에 이르는 들이다. ‘까치개들’은 ‘까치개’와 ‘들’로 나뉘며, ‘까치고개 부근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모링이들 : ‘재평골’ 동쪽에 있는 들이다. ‘모링이들’은 ‘모링이’와 ‘들’로 나뉜다. ‘모링이’는 ‘모롱이’의 방언형이므로, ‘모링이들’은 ‘산모퉁이의 휘어 둘린 곳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실제로 이 들은 미암3리와 도안면 화성리 경계가 되는 산모퉁이에 있다. 모링이보(-洑) : ‘모링이들’ 부근, 보강천에 있는 보이다. ‘모링이보’는 ‘모링이’와 ‘보’로 나뉘며, ‘모링이들에 물을 대주는 보’로 풀이된다.부엉배기골 : ‘까치고개’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부엉배기골’은 ‘부엉배기’와 ‘골’로 나뉜다. ‘부엉배기’는 ‘부엉박이’의 이모음역행동화 어형이고, ‘부엉박이’는 ‘부엉박’에 접미사 ‘이’가 붙은 어형이다. 그렇다면 ‘부엉박이’는 ‘부엉이가 박혀 있는 곳’으로 풀이되어, 의미전달에 문제가 있다. 따라서 ‘부엉배기골’은 ‘부엉배골’의 변화형으로 보아야 한다. ‘부엉배골’은 ‘부엉배’와 ‘골’로 나뉘며, ‘부엉배’는 ‘부엉바위’의 변화형이다. ‘부엉배골’이나 ‘부엉배기골’은 ‘부엉이가 서식하는 바위가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서낭앞들 : ‘모링이들’ 서쪽, 36번국도에 붙어 있는 들이다. 지금은 ‘(주)도안농기계’ 등 작은 업체들이 들어와 있다. ‘서낭앞들’은 ‘서낭앞’과 ‘들’로 나뉘며, ‘서낭당 앞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서낭당’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초중7리 ‘서낭골’을 참고하기 바란다.음바리/하평(下坪) : ‘재평골’ 아래쪽 도로변에 있던 마을이다. 1980년대 초에 마을이 사라지고, 현재는 납골당 등 석물(石物)만 전시되어 있다.『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하평사(下坪沙)’로 불리던 곳이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下平沙/음바리’로 기록되어 있다. ‘음바리’는 전국에 유일한 지명이다. ‘음바위’ㆍ‘음박골’ㆍ‘음방’ㆍ‘음백암’ 등이 모두 ‘음달’과 관련됨을 볼 때, ‘음바리’도 이와 관련하여 풀이할 수 있겠다. 이 마을은 달리 ‘하평’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재평골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풀이된다.이재물구렁 : ‘까치고개’ 북쪽에 있는, 이성산의 구렁이다. ‘이재물구렁’은 ‘이재물’과 ‘구렁’으로 나뉜다. 그러나 ??이재물??의 어원을 추정하기가 쉽지않다
  • 미암4리(彌岩四里) : ㆍ대지랭이/대자양(大紫陽) : ‘시화’에서 서북쪽으로 1.5km 거리에 있는 마을이다. 두타산 기슭에 있는 마을로, 골이 깊어서 ‘대지랭이’로 불렸다 한다. 또는 ‘대봉산(大峰山)’ 자락이어서 ‘대지랭이’가 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대지랭이’는 ‘대지랑이’의 이모음역행동화 어형이다. ‘대지랑이’는 ‘대지랑’에 접미사 ‘이’가 붙은 어형이다. ‘대지랑’은 ‘대지낭’의 변화형으로, ‘대지(大地)’와 ‘낭’으로 나뉜다. 여기서 ‘낭’은 ‘낭떠러지’를 뜻하니, ‘대지낭’은 ‘큰 땅의 낭떠러지’로 풀이되고, ‘대지낭이’나 변화형 ‘대지랭이’는 ‘큰 땅의 낭떠러지가 있는 마을’로 풀이된다. 이 마을은 달리 ‘대자양’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양지바르고 아늑해 살기 좋은 곳’이라는 뜻이라 한다. 그러나 이도 ‘대지랭이’를 음차(音借)한 이름으로 보아야 한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에는 청안현 북면에 속한 ‘대자랑리(大自郞里)’로,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는 ‘자양(紫陽)’으로 표기되어 있다. 대봉골(大峰-) : ‘대지랭이’ 입구에서 대봉산으로 가는 골짜기이다. ‘대봉골’은 ‘대봉’과 ‘골’로 나뉘며, ‘대봉산으로 가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동현[東軒]/도안(道安) : ‘대봉산’ 밑을 가리킨다. 이곳에 도안현의 동헌이 있었다고 해서 ‘동현’ 또는 ‘도안’으로 표기돼 왔다고 한다. ‘동현’은 ‘동헌’의 변화형이고, ‘도안’은 ‘도안현’을 뜻하는 이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 조선시대에 발간된 각종 기록에 따르면 태종 5년(1405)까지 존속했던 도안현의 현청(縣廳)으로 추정된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도 청안군 북면의 ‘도안(道安)’으로 표기되어 있다. 현재 ‘사임당어린이집’ 뒤쪽에서 고려시대~조선시대 기와편이 수습되는 것으로 보아서도 이런 추정은 가능하다. 미암소류지(彌岩小溜池) : ‘대지랭이’에 있는 못이다. ‘미암소류지’는 ‘미암’과 ‘소류지’로 나뉘며, ‘미암리에 있는 못’으로 풀이된다. 부채당골[-堂-] : ‘대지랭이’에서 ‘산너머길골’ 아래 왼쪽으로 두타산에 오르는 골짜기이다. ‘부채당골’은 ‘부채당’과 ‘골’로 나뉘며, ‘부채당’은 ‘부처당’의 변화형이다. 따라서 ‘부채당골’은 ‘부처당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부처당‘은 ’불당(佛堂)‘과 같은 뜻이다. 이곳엔 예전에 암자가 있었다. 산너머길골(山-) : ‘대지랭이’에서 북쪽으로 두타산에 오르는 골짜기이다. 두타산을 넘어 진천과 도안면 연촌리로 갈 수 있다. ‘산너머길골’은 ‘산너머길’과 ‘골’로 나뉘며, ‘산너머길’은 다시 ‘산너머’와 ‘길’로 나뉜다. 따라서 ‘산너머길골’은 ‘산 너머로 가는 길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5) 미암5리(彌岩五里) ㆍ단지바위/단지배/단암(丹岩) : ‘미륵댕이’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단암(丹岩)’으로 불리던 곳이다. 형석중학교 뒤[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미암5리마을회관이 있다. ‘단지바위’는 ‘단지’와 ‘바위’로 나뉘며, ‘단지 모양의 바위’로 풀이된다. 달리 ‘단지배’로도 불리는데, ‘배’는 ‘바위’의 방언형이니, 그 뜻은 ‘단지바위’와 같다. ‘단암’은 ‘단지’의 뜻과 관계없이 음을 빌려 ‘단(丹)’으로 표기하고 ‘바위’의 뜻을 빌려 ‘암(岩)’으로 표기한 이름이다. 이 마을의 ‘방구배기들’에 단지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는데, ‘증평일반산업단지’ 조성으로 바위가 없어졌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丹岩里/단지바위’로 기록되어 있다. 말무덤 : ‘단지바위’ 동북쪽, 이성산 기슭에 있던 무덤이다. 밑 둘레가 29mㆍ높이가 3.3m 가량 되는 둥근 형태의 큰 무덤이지만, 돌보는 이가 없어 무덤인지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증평일반산업단지’를 조성할 때, 아무 것도 나온 것이 없었다. ‘말무덤’은 ‘말’과 ‘무덤’으로 나뉜다. ‘말’은 ‘말개’ㆍ‘말거리’ㆍ‘말고개’ㆍ‘말골’ㆍ‘말구렁’ㆍ‘말나루’ㆍ‘말들’ㆍ‘말무덤’ㆍ‘말무더미’ㆍ‘말무듬’ㆍ‘말무데미’ㆍ‘말무디미’ㆍ‘말배미’ㆍ‘말봉’ㆍ‘말산’ㆍ‘말샘’에서와 같이 매우 흔히 사용되는 전부요소이다. 이들 대부분은 한자 ‘마(馬)’나 ‘두(斗)’로 표기되면서 ‘마(馬)’나 ‘두(斗)’와 관련된 유래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니, 이때의 ‘말’은 오히려 ‘크다[大]’와 관련된다. ‘말’을 ‘크다’로 이해한다면, ‘말무덤’은 ‘큰 무덤’으로 풀이된다. 지역에 따라서는, ‘말무덤’이 ‘말무데미’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말무덤’에 접미사 ‘이’가 붙어 ‘말무덤이’가 되고 이것이 이모음역행동화를 일으킨 결과이다. ‘말무덤’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삼국이 치열하게 대립하던 때, 미암리 인근 지역은 접경 지역이었던 터라 하루가 다르게 그 주인이 바뀌었다. 어느 해 고구려와 신라가 이성산을 쟁탈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승기(勝氣)가 고구려 쪽으로 기울자 신라군은 도주하기 시작했다. 고구려 군사를 이끌던 한 장수는 때를 놓치지 않고 도주하는 신라 장수를 추격했다. 그러다 그만 날아드는 화살을 맞고 전사하고 말았다. 장수가 쓰러지자 그가 아끼던 명마는 꼼짝도 하지 않고 주인 곁을 지켰다.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그저 주인 곁을 맴돌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명마도 장수를 따라 숨을 거두었다. 미물이라도 죽음으로 충성을 다한 명마의 넋을 기리기 위해 부하 장졸들은 장수와 함께 명마를 묻고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설은 그저 전설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방구배기들/방구뱅이들 : ‘단지바위’ 동쪽, 형석중학교 뒤에 있는 들이다. ‘증평일반산업단지’로 개발되었다. ‘방구배기들’은 ‘방구배기’와 ‘들’로, ‘방구배기’는 ‘방구’와 ‘배기’로 나뉜다. ‘방구’는 ‘바위’의 방언형이고, ‘배기’는 ‘박이’의 이모음역행동화 어형이다. ‘박이’는 ‘박다’의 어간 ‘박’에 접미사 ‘이’가 붙은 어형으로, ‘박혀 있는 곳’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방구배기들’는 ‘바위가 박혀 있는 곳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달리 ‘방구뱅이들’로도 불리는데, 이는 ‘방구배기들’의 변화형으로, 그 뜻은 같다. 산 쪽으로 단지 모양의 바위가 있어 붙은 이름이고, 이 돌로 인해 ‘단지바위’[마을]가 붙었다. 승지골 : ‘방구배기들’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전국적으로 ‘승지골’은 ‘승적골’과 병용되는 곳이 많다. 따라서 ‘승적골’은 변화형으로 추정할 수 있다. ‘승적골’은 ‘승’과 ‘적골’로 나뉜다. 여기서 ‘승’은 두 가지와 관련된다. 하나는 ‘성(城)’이니, ‘승적골’이 ‘성적골’이 함께 쓰이는 예가 이를 뒷받침한다. 다른 하나는 ‘속[內]’이니, ‘승골’이 ‘송골’과 같이 쓰이는 예가 이를 뒷받침한다. 이때 ‘송’은 ‘속[內]’에서 변화되어 굳어진 전부요소로 추정된다. ‘적골’은 ‘절골’의 변화형이다. ‘절골’에 사이시옷이 개재하여 ‘젌골’이 되고, ‘젌골’에서 ‘ㄹ’이 탈락하여 ‘젓골’이 되었다. 다시 ‘젓골’이 미파화에 의해 ‘젇골’이 되고, ‘젇골’이 연구개음화에 의해 ‘적골’이 된 것이다. 즉 ‘절골>젌골>젓골>젇골>적골’의 변화 과정을 상정할 수 있다. 최초의 어형 ‘절골’이나 이에서 변한 ‘젓골’ㆍ‘적골’은 전국적으로 매우 흔한 지명인데, 대부분 ‘절이 있는 골짜기’란 뜻을 갖고 있다. 이상의 설명에 따르면, ‘승지골’은 ‘성 부근에 있는 절 골짜기’나 ‘산속 깊숙이 있는 절 골짜기’로 풀이된다. 아치내들/아침이들 : 형석중학교 서쪽, ‘단지바위’ 남쪽에 있는 들이다. 자양천 건너에 있다. ‘아치내들’은 ‘아치내’와 ‘들’로, ‘아치내’는 ‘아치’와 ‘내’로 나뉜다. ‘아치’는 ‘작은[小]’의 뜻이니, ‘아치내들’은 ‘작은 내에 인접한 들’로 풀이된다. ‘아치내’는 대지랭이에서 발원한 ‘자양천’을 가리키는 것으로, 수량이 대단하지 않다. 달리 ‘아침이들’로도 불리는데, 이는 ‘아치내들’의 변화형이다.

[ 문화재 ]

ㆍ미암리사지석조관음보살입상(彌巖里寺址石造觀音菩薩立像) : 미암1리 ‘미륵댕이’의 미륵사(彌勒寺) 경내에 있다. 300여 년 된 느티나무 아래, 보호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기록인『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는 “증평면 미암리 마을에 있는데, 높이 8척 5촌ㆍ어깨 폭 2척ㆍ머리부 길이 2척 3촌의 석불로 완전하다.”고 했다. 이 불상은 높이 2.6m로 얼굴이 넓으며, 머리에는 화불을 양각한 보관(寶冠)을 쓰고, 이마의 눈썹 사이에 백호(白毫)가 양각되어 있고, 목 부분에는 삼도(三道)가 선명하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양팔에 걸쳐 배 아래로 흘러내려 활모양의 주름이 어깨에 걸쳐 옆으로 내려졌고, 연꽃을 쥔 오른손은 가슴으로 올렸으며, 왼손은 배 위에 붙여 내장(內掌)했다. 현재 두 발이 땅 밑에 묻혀 있고, 시멘트로 목 부분을 보강해 놓았으며, 보살입상 앞에는 길이 1.23mㆍ폭 0.57mㆍ두께 0.12m의 화강암 배례석(拜禮石)이 놓여 있다. 보관 위에 놓였던 보개석(寶蓋石)으로 추정되는 6각형의 석재가 보호각 앞의 느티나무 밑에 있었으나, 1993년 5월에 잃어버렸다고 한다. 보관의 화불이나 옷 무늬, 상호 등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증평 지역에 남아 있는 다른 불상들과의 양식적인 관련성과 신앙 형태에 대한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불상은 마을의 수호불(守護佛)로 보호하고 매년 마을제로 불공을 드려오고 있으며, 이로 인해 ‘미륵댕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증평문화원과 증평향토문화연구회의 조사ㆍ연구 활동을 통해 문화재로서 보존 관리가 필요함을 각계에 인식시킴으로 1998년 12월 31일에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98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