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의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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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읍

시골학교의 자잘한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는 곳

죽리 (竹里)

[ 연혁 ]

죽리(竹里)는 본래 조선시대 청안현(淸安縣) 남면(南面) 지역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 기록에는 청안현 남면에 27개리가 있었다. 그 중에서 현재의 죽리와 관련된 마을로는 대술리(大述里)ㆍ중리(中里)ㆍ비조리(飛鳥里)ㆍ서원리(書院里) 등 4개리가 있었다. 그 뒤 죽리는 건양(建陽) 원년(1895)에 청안현(淸安縣)이 청안군(淸安郡)으로 승격되면서 청안군의 6개면인 읍내면(邑內面)ㆍ동면(東面)ㆍ남면(南面)ㆍ북면(北面)ㆍ서면(西面)ㆍ근서면(近西面) 중에서 남면(南面)에 속하는 지역이 되었다.『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 당시 청안군 남면은 25개리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 사이 대술리(大述里)가 대수리(大水里)로, 비조리(飛鳥里)가 비학리(飛鶴里)로, 서원리(書院里)가 서동리(書洞里)로 바뀌었다. 또한 모평리(牟坪里)와 원평리(院坪里)가 새로 생겼다.1914년에 일본제국주의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증평면(曾坪面)은 11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따르면, 죽리는 남면 모평리(牟坪里)ㆍ대수리(大水里)ㆍ중리(中里)ㆍ비학리(飛鶴里)ㆍ원평리(院坪里)ㆍ서동(書洞) 일부와 청주군 산외이면(山外二面)의 월경리(越境里) 일부를 병합하여 만들었다. 이때 죽리라 하고, 괴산군 증평면에 편입하였다.1990년 12월 31일에 지방자치법 제106조 및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괴산군 증평읍에서 충청북도증평출장소(忠淸北道曾坪出張所)로 바뀔 때, 죽리는 증천지소(曾川支所) 관할이었다.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증평읍 죽리가 되었다.

[ 유래 ]

죽리는 1914년에 새로 붙은 마을 이름이다. 본래는 남하리ㆍ덕상리ㆍ남차리의 중간에 있으므로 ‘중리(中里)’였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과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중리(中里)’로 기록되어 있다. 김기빈(1995)의『일제에 빼앗긴 땅들을 찾아서』에는 “증평읍 죽리는 그 전에 청안군 남면 지역으로, 남하리와 남차리의 중간에 있었으므로 중리(中里)라 불렀던 곳이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폐지ㆍ분합할 때 인근의 마을을 합해 죽리(竹里)가 된 곳이다. 죽리의 내력이 확실하지 않으며 그 이전까지 중리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마을은 과거 대나무가 많았고 대나무는 선비를 상징하는 바, 이런 뜻에서 죽리(竹里)가 본래 이름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조선 중기 시인 백곡 김득신(金得臣, 1604~1684) 의 시 ‘죽리고연(竹里孤煙)’이 그것이다. 이 마을에는 2010년 5월 현재 102세대에 237명이 거주하고 있다. 김득신(金得臣)의 ‘죽리고연(竹里孤煙)’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죽리 (竹里) :죽리는 1914년에 새로 붙은 마을 이름이다. 본래는 남하리ㆍ덕상리ㆍ남차리의 중간에 있으므로 ‘중리(中里)’였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과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중리(中里)’로 기록되어 있다. 김기빈(1995)의『일제에 빼앗긴 땅들을 찾아서』에는 “증평읍 죽리는 그 전에 청안군 남면 지역으로, 남하리와 남차리의 중간에 있었으므로 중리(中里)라 불렀던 곳이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폐지ㆍ분합할 때 인근의 마을을 합해 죽리(竹里)가 된 곳이다. 죽리의 내력이 확실하지 않으며 그 이전까지 중리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마을은 과거 대나무가 많았고 대나무는 선비를 상징하는 바, 이런 뜻에서 죽리(竹里)가 본래 이름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조선 중기 시인 백곡 김득신(金得臣, 1604~1684) 의 시 ‘죽리고연(竹里孤煙)’이 그것이다. 이 마을에는 2010년 5월 현재 102세대에 237명이 거주하고 있다. 김득신(金得臣)의 ‘죽리고연(竹里孤煙)’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원평리 (院坪里) : ㆍ원평(院坪) : 죽리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원평(院坪)’으로 불리던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중종 25년, 1530) 청주목(淸州牧) 역원조(驛院條)에, 북쪽으로 37리에 포원(蒲院)이 있다고 적고 있는데 이 포원이 있던 곳이 ‘원평’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포원’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가 있다. 일제강점기 청주군 산외이면에도 ‘원평’이란 마을 이름이 있다. 이로 보아 ‘포원’은 청안군 남면이 아니라, 청주군 산외이면의 ‘원평’일 수도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청안현 역원조에, “서쪽 15리에 장후원(長候院)이 있다.”고 했는데 방향은 다르지만 이 ‘장후원’이 원평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도 있다.『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고유지명 없이 ‘院坪’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원(院)은 고려ㆍ조선시대에 지방으로 출장한 관원들을 위해 각 요로(要路)와 인가가 드문 곳에 둔 나라가 운영하던 숙식시설이다. 이 원의 운영을 위해 일정한 토지를 배속했는데, 이것이 원평(院坪)이다. ㆍ사거리(四巨里)/죽리사거리(竹里四巨里) : ‘원평’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서 증평[북쪽]ㆍ율리[남쪽]ㆍ청안[동쪽]ㆍ초중리[서쪽]로 가는 네 갈래 길이 있어서, ‘사거리’ 또는 ‘죽리사거리’로 불린다.비학리(飛鶴里) : ‘원평’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비학리에는 우물이 있었는데 우물에서 학이 날아갔다는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에 청안현 남면에 ‘비조리(飛鳥里)’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곳이 ‘비학리’로 변경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조리’나 ‘비학리’ 모두 새[학]가 날아갔다는 말로, 예전에 이곳이 학의 서식지여서 마을 이름이 유래된 듯하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과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비학(飛鶴)’이 보인다. 1914년 일본 육지측량부(陸地測量部)가 측량하여 1916년 제작한 지도를 살펴보면 ‘비학리’는 죽리(竹里) 내에 속한 자연마을로 표기되어 있다. ‘비학리’는 현재 없어진 마을이다. 다만 삼보산 줄기에 ‘비학골’이라는 이름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비학골’은 현재 ‘죽리토종식품’과 돼지사육장 북쪽 골짜기를 말한다. 현재도 ‘비학골’ 동쪽 덕상3리 ‘덕령’에는 백로가 집단적으로 서식하고 있다. 일부 지도는 ‘피아골’로 적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표기이다.속구렛들 : ‘첫구렛들’ 서쪽에, ‘첫구렛들’과 이어져 있는 들이다. 삼기천에 닿아 있지 않다. ‘속구렛들’은 ‘속’과 ‘구레들’이 사이시옷을 매개로 연결된 어형이다. ‘구레들’은 ‘구레’와 ‘들’로 나뉜다. ‘구레’는 ‘낮아서 물이 늘 괴어 있는 땅바닥’을 말한다. 이 ‘구레’는 들 이름으로 많이 쓰이는데, 때에 따라서는 ‘들’을 덧붙여 ‘구렛들’로도 쓰인다. 따라서 ‘속구렛들’은 ‘구렛들 중 속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첫구렛들’과 대비적으로 쓰인 이름이다. 속지실골(-池-) : ‘첫구렛들’ 서쪽에 붙어 있는 골짜기이다. ‘속지실골’은 ‘속지실’과 ‘골’로, ‘속지실’은 다시 ‘속’과 ‘지실’로 나뉜다. ‘지실’은 ‘지곡’과 병용되는 예가 많은데, ‘지곡’은 ‘못말’을 뜻한다. 따라서 ‘속지실골’은 ‘속에 못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원골(院-) : ‘원평’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원골’은 ‘원’과 ‘골’로 나뉘며, ‘원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원(院)’은 ‘고려ㆍ조선 시대에, 나라에서 역(驛)과 역 사이에 두어 출장 관원을 유숙하게 하였던 여관’을 말한다. 이곳에 옛날 원 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원평앞들(院坪-) : ‘원평’ 동쪽에 있는 들로, 삼기천과 닿아 있다. ‘원평앞들’은 ‘원평’과 ‘앞들’로, ‘앞들’은 다시 ‘앞’과 ‘들’로 나뉜다. 따라서 ‘원평앞들’은 ‘원평마을 앞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첫구렛들 : ‘사거리’가 있는 들로, 삼기천과 닿아 있다. ‘첫구렛들’은 ‘첫’과 ‘구레들’이 사이시옷을 매개로 연결된 어형이다. ‘구레들’은 ‘구레’와 ‘들’로 나뉜다. ‘구레’는 ‘낮아서 물이 늘 괴어 있는 땅바닥’을 말한다. 이 ‘구레’는 들 이름으로 많이 쓰이는데, 때에 따라서는 ‘들’을 덧붙여 ‘구렛들’로도 쓰인다. 따라서 ‘첫구렛들’은 ‘구렛들 중 처음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속구렛들’과 대비적으로 쓰인 이름이다. 청룡샘(靑龍-) : ‘원평’에 있는 샘이다. 산자락 끝에 있는 샘으로, 현재 식수로는 이용되지 않는다. ‘청룡샘’은 ‘청룡’과 ‘샘’으로 나뉜다. 지명에 나타나는 ‘청룡’은 주로 ‘주산(主山)에서 뻗어나간 왼쪽 산줄기’를 가리킨다. 풍수지리상 ‘좌청룡우백호(左靑龍右白虎)’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청룡샘’은 ‘마을 왼쪽 산줄기에 있는 샘’으로 풀이된다.

[ 문화재 ]

ㆍ양무공사(襄武公祠) : 양무공(襄武公) 황희석(黃希碩)의 불천지위(不遷之位) 사당으로, 증평읍 죽리 101번지 ‘원평’에 있다. 선조 28년(1595)에 처음으로 세워진 이 사당은 영조 5년(1729)ㆍ1952년ㆍ1972년에 중수했고, 건물의 구조는 정면 3칸ㆍ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겹처마 목조기와집이다. 사당 앞에는 정면 3칸ㆍ측면 1칸의 맞배지붕 구조의 동재(東齋)와 정면 2칸ㆍ측면 1칸 맞배지붕 구조의 서재(西齋)가 있다. 그리고 사당 앞에는 1978년에 세운 ‘평해군묘정비(平海軍廟庭碑)’가 있다. 건물 둘레에는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으며, 밖에서 보면 좌측에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2004년 4월 30일에 증평군우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양무공(襄武公) 황희석(黃希碩: ?~1394)은 고려 말~조선 초의 무신으로, 본관은 평해(平海)이다. 고려 우왕 7년(1381)에 왜구가 침입해 전라도 지역이 소란해지자 체찰사(體察使)로 파견돼 진압했다. 1388년에 요동 원정군이 발진하자 청주상만호(淸州上萬戶)로서 예하군사를 이끌고 우군도통사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갔다. 이성계가 회군(回軍)을 단행해 반정에 성공하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올랐으며, 공양왕 1년(1389) 회군공신에 책록되었다. 정몽주가 격살 당하자 사태 수습책으로 정몽주 일파를 탄핵해 정몽주 일파에게 죄줄 것을 청함으로써 공양왕의 폐위와 조선 건국의 명분을 세운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었다. 조선 태조 1년(1392) 8월에 조선 개국공신 44인과 원종공신 28인이 책봉될 때 포함되었다가, 한 달 뒤에 태조의 특지로 개국공신 2등에 추가 책록되었다. 1394년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지내다가 죽으니 사후에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ㆍ죽리선돌(竹里-) : 죽리선돌은 2개가 쌍을 이루고 있는데, 모두가 화강암이다. 남성선돌은 죽리 죽리초등학교 북쪽 농로에 있고, 여성선돌은 남쪽의 농로 옆에 있다. 선돌이 있는 죽리는 증평에서 미원ㆍ초정으로 이어지는 평야지대이다. 주변 하천으로는 북쪽 삼기저수지 쪽에서 발원하는 삼기천이 보강천으로 이어져 흐르고 있다. 남성선돌은 남근(男根) 모습으로, 아래쪽 폭은 약 45cm이고 높이는 약 120cm 정도이다. 여성선돌은 평평한 판석으로, 아래쪽 폭은 약 110cm이고 높이는 약 140cm 정도이다. 이 선돌은 죽리 주민들의 수호신으로, 과거 귀신을 물리치고 풍요를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증평에서 미원 방면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안녕과 복을 빌어주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