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의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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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읍

효향 그윽한 고장

남하리 (南下里)

[ 연혁 ]

남하리(南下里)는 본래 조선시대 청안현(淸安縣) 남면(南面) 지역이다. 『호구총수(戶口總帥)』(정조 13년, 1789) 기록에는 청안현 남면에 27개리가 있었다. 그 중에서 현재의 남하리와 관련된 마을로는 금반리(金盤里)ㆍ둔덕리(屯德里)ㆍ서원리(書院里) 등 3개리이다. 그 뒤 남하리는 건양(建陽) 원년(1895)에 청안현(淸安縣)이 청안군(淸安郡)으로 승격되면서 청안군의 6개면인 읍내면(邑內面)ㆍ동면(東面)ㆍ남면(南面)ㆍ북면(北面)ㆍ서면(西面)ㆍ근서면(近西面) 중에서 남면(南面)에 속하는 지역이 되었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寒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 당시 청안군 남면은 25개리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 사이 서원리(書院里)가 서동(書洞)으로 변경되었고, 포천리(浦川里)ㆍ금리(金里)ㆍ염곡리(?谷里)ㆍ탑동(塔洞)이 새로 생겼다.1914년에 일본제국주의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증평면(曾坪面)은 11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따르면, 남하리는 남면 포천리(浦川里)ㆍ금리(金里)ㆍ염곡리(濂谷里)ㆍ탑동(塔洞)ㆍ금반리(金盤里)ㆍ둔덕리(屯德里)ㆍ서동(書洞)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만들었다. 이때 지역이 남쪽 아래가 되므로 남하리라 하고, 괴산군 증평면에 편입하였다.1990년 12월 31일에 지방자치법 제106조 및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괴산군 증평읍에서 충청북도증평출장소(忠淸北道曾坪出張所)로 바뀔 때, 남하리는 증천지소(曾川支所) 관할이었다.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증평읍 남하리가 되었다.

[ 유래 ]

남하리는 1914년 4월 1일에 포천리(浦川里)ㆍ금리(金里)ㆍ염곡리(濂谷里)ㆍ탑동(塔洞)ㆍ금반리(金盤里)ㆍ둔덕리(屯德里)ㆍ서동(書洞)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만들었는데, 지역이 남쪽 아래가 되므로 붙은 이름이다. 남하리는 삼보산(三寶山)과 남대산(南大山)을 등지고 있으며, 앞으로는 삼기천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다. 내 주변에는 크고 적은 능선과 넓은 들이 펼쳐져 있어 배산임수의 명당 마을이다. 면적은 3.45km2로, 증평군 전체 면적[81.84km2]의 4.2%에 해당한다. 동쪽으로 용강리와 덕상리가, 서쪽으로 삼보산과 남대산을 넘어 청원군 내수읍과 북이면이, 남쪽으로 죽리가, 북쪽으로는 내성리가 접해 있다. 최근에는 남하2리 ‘둔덕’에서 ‘장뜰들노래축제’가 열리고 있고, 지역박물관이 건립되었다. 2010년 5월 현재 237세대에 539명이 거주하고 있다.

  • 남하1리(南下一里) : ㆍ포천(逋川) : ‘금반리’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마을이다. 503번지방도와 삼기천(三岐川) 가에 있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寒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과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포천(逋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1940년대까지 삼기천 냇물은 지금의 마을 앞을 흐르고 있었다. 따라서 물가에 있는 마을이라서 ‘포천’으로 불린 것이다. ㆍ양지말(陽地-)/양촌(陽寸) : 금반리마을회관 앞 실개울을 건너, 작은 능선을 등지고 있는 마을이다. 동남쪽을 향하고 있어 하루 종일 햇빛이 비춰 붙은 이름이다. 달리 ‘양촌’으로도 불린다. ㆍ금반리(金盤里)/솔모루/송우(松隅) : ‘염실’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503번지방도를 따라 ‘포천’에서 남하3리 ‘염실’로 들어가는 첫 마을로, 남하1리마을회관이 있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년)와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금반리(金盤里)’로 불리던 곳이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金盤’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 마을회관에서 남동쪽으로 800m쯤 떨어진 곳에 잘 정리된 논이 있는데, 이 논 가운데 ‘마당바위’가 있다. 과거 ‘마당바위’ 뒤쪽으로 안동김씨(安東金氏)들이 살았는데, 이 바위 모양이 쟁반같이 생겼고 안동김씨가 많이 살고 있다고 해서 ‘금반리(金盤里)’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안동김씨의 집터는 1980년경 경지정리로 인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달리 ‘솔모루’ 또는 ‘송우(松隅)’로도 불리는데, 이는 ‘염실’과 청안현을 오고가는 길목에 소나무가 많은 산모퉁이에 있는 마을이라 붙은 이름이다. ‘송우’는 ‘소나무 송(松)’자와 ‘모퉁이 우(隅)’자를 쓴 것이니, ‘솔모루’에 대한 한자 이름이다. 조선 세종 때 시인으로 청주목과 청안현을 두루 다니며 많은 시를 남긴 진의귀(陳義貴: ?∼1424)의 시문(詩文) 중에 ‘송우(松隅)’가 있다. ㆍ장성(長城) : ‘금반리’에서 ‘염실’로 가는 입구에 있는 마을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에 장성리(長城里)로 기록되어 있다. 마을 모양이 길게 성(城)처럼 늘어져 있어 붙은 이름이다. 군기미들(軍器-) : ‘포천’과 남하2리 ‘둔덕’ 사이에 있는 들이다. ‘군기미들’은 ‘군기미’와 ‘들’로, ‘군기미’는 다시 ‘군기’와 ‘미’로 나뉜다. ‘군기’는 ‘군기고(軍器庫)’를, ‘미’는 ‘산’을 뜻한다. 따라서 ‘군기미들’은 ‘군기고가 있는 산 부근의 들’로 풀이된다. ‘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송산2리 ‘안자산2’를 참고하기 바란다. 날개버들/날기버들 : ‘금반리’에서 남하3리 ‘염실’로 가는 곳에 있는 작은 들이다. ‘귀골’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새의 날개 형상으로 펼쳐져 있어 붙은 이름이 ‘날개버들’이다. 달리 ‘날기버들’로도 불리는데, 그 뜻은 같다고 한다. 그러나 ‘날개버들’이나 ‘날기버들’에서 ‘날개’나 ‘날기’는 ‘낡은’ 즉 ‘늙은’을 뜻한다. 따라서 ‘날개버들’이나 ‘날기버들’은 ‘늙은 버드나무가 있는 곳’으로 풀이된다. 느티나무 : ‘금반리’에 있는 350여 년 된 나무로, 마을 사람들이 매우 소중하게 보호하고 있다. 이 나무는 국난 때마다 울음을 터뜨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910년에 일제가 합병을 했을 때, 1950년에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1979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이 나무가 울었다고 한다(괴산문화원, 1999). 마당바위 : 503번지방도를 따라 ‘포천’에서 죽리로 가는 방향으로 500m쯤 가다보면 서쪽으로 잘 정리된 논 가운데 유일한 밭[1300여m2(400평)]이 있다. 이 밭에 있는 바위를 말한다. 바위가 노출된 부분은 폭 5m, 길이 8m 정도이지만 나머지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넓다. 밭의 대부분이 바위여서 논 대신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바위 위쪽에 조선 말기까지 안동김씨 동지사공(同知事公)과 진사공(進士公)이 살던 저택이 있었고, 이 집을 ‘김참판댁’ 또는 ‘청안마당바위집’으로 불렀다. 이 바위는 청주와 청안현을 연결하는 길과 율리와 증천리를 연결하는 네거리에 있어, 오고가는 과객들이 쉬었다 가는 바위이기도 했다. 버리들 : 금반리마을회관에서 죽리로 가는 방향으로 ‘마당바위’가 있는 부근의 논을 말한다. 1980년경 경지정리가 되기 전에는 보리를 많이 심은 밭이어서 ‘보리들’이라고 불리다가 ‘버리들’로 변했다고 한다. 버리들보(-洑) : ‘포천이보’ 남쪽에 있는, 삼기천을 막은 보이다. ‘버리들보’는 ‘버리들’과 ‘보’로 나뉘며, ‘버리들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보’로 풀이된다. 샘 : ‘금반리’의 미륵불 밑에 있는 시루만한 크기의 샘이다. 이 샘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이 샘은 부정한 사람과 정갈한 사람을 구별하는 영험이 있었다. 부정한 사람이 물을 구하면 샘은 저절로 말라버렸고, 정갈한 사람이 물을 구하면 샘은 저절로 깨끗한 물을 쏟아냈다. 또한 부정한 사람이 물을 구하는 것을 꺼려 샘 주위에 구렁이가 상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갈한 사람이 오면 구렁이는 순식간에 사라졌다(괴산문화원, 1999). 원댕이보[願堂-洑] : ‘포천’에 동북쪽, 삼기천에 있는 보이다.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원댕이보’는 ‘원댕이’와 ‘보’로 나뉘며, ‘원댕이들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보’로 풀이된다. ‘주암나무보’ 남쪽에 있다. 원댕이들[願堂-] : ‘포천’ 북쪽으로 삼기천 건너에 있는 들이다. ‘원댕이들’은 ‘원당이들’의 이모음역행동화 어형이다. ‘원당이들’는 ‘원당이’와 ‘들’로 나뉘며, ‘원당이’는 ‘원당’에 접미사 ‘이’가 붙은 어형이다. 따라서 ‘원댕이보’는 ‘원당 가까이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원당’은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던 법당’을 뜻하니, 예전에 이 보 근처에 원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재(場-) : 양지말 뒤[서쪽]에 있는 고개로, 남하2리 ‘둔덕’으로 가는 길목이다. 현재 ‘(주)대유통신’이 있는 곳으로, 농로길이다. ‘장재’는 ‘장’과 ‘재’로 나뉘며, ‘장을 보러 다닐 때 넘는 고개’로 풀이된다. 이 고개는 남하3리 ‘염실’ 주민들이 증평장을 오고가는 길목이었다. 장재골(場-) : ‘양지말’ 뒤[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장재골’은 ‘장재’과 ‘골’로 나뉘며, ‘장재가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포천이들(逋川-)/마릿들 : ‘포천’ 서북쪽에 있는 들로, ‘원댕이들’ 맞은편에 있다. ‘포천이들’은 ‘포천이’와 ‘들’로 나뉘며, ‘포천이’는 ‘포천’에 접미사 ‘이’가 붙은 어형이다. 따라서 ‘포천이들’는 ‘포천마을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마을 이름에 기대어 붙은 이름이다. 달리 ‘마릿들’로도 불린다. ‘마릿들’은 ‘마리’와 ‘들’이 사이시옷을 매개로 연결된 어형이다. 여기서 ‘마리’는 ‘마루’의 변화형이다. ‘마루’는 일찍부터 지명에 사용되어 왔으니, ‘마루’ 외에 ‘말’ㆍ‘마리’ㆍ‘말양’ㆍ‘말랑’ㆍ‘말랑이’ㆍ‘날망’으로 나타나는데, ‘평지보다 약간 높으면서 평평한 곳’을 가리킨다. 그리고 ‘마루’는 후부요소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전부요소로도 적극적으로 사용되는데. 이때에는 ‘넓은’ㆍ‘큰’ㆍ‘높은’ㆍ‘으뜸인’의 뜻을 지닌다. 한편 ‘들’은 ‘들(野)’의 뜻이다. 따라서 ‘마룻들’이나 ‘마릿들’은 ‘높으면서 평평한 들’로 해석된다. ‘마루’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연탄3리 ‘쇠마루/금헌(金軒)/새터’를 참고하기 바란다. 포천이보(逋川-洑) : ‘포천’ 서북쪽에 있던 보로, 삼기천을 막아 만들었다. ‘원댕이보’ 남쪽에 있다. ‘포천이보’는 ‘포천이’와 ‘보’로 나뉘며, ‘포천이’는 ‘포천’에 접미사 ‘이’가 붙은 어형이다. 따라서 ‘포천이보’는 ‘포천이들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보’로 풀이된다. 그러나 현재는 율1리 ‘삼기저수지’ 물을 이용하는 관계로 사용되지 않는다.
  • 남하2리(南下二里) : ㆍ둔덕(屯德) : 증평읍내에서 남하리로 갈 때 제일 먼저 만나는 마을이다. 즉 ‘금반리’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마을로, 삼기천 가에 있다. 남하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둔덕리(屯德里)라는 마을 이름은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1789년 이전부터 있었던 마을로 추정된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寒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과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둔덕리(屯德里)’로 기록되어 있다. 이 마을은 효령대군 8세손 이정(李晶, 1599∼1631)이 병자호란[인조 14년, 1636]을 피해 혼자 몸으로 이거한 곳이다. 이정은 나라를 지키는 데는 인재양성이 중요함을 깨닫고 ‘하루 세 끼 밥은 못 먹더라도 자녀교육과 이웃에 덕을 베푸는 일은 게을리 하지 말자.’는 신념으로 살아갔다고 전한다. 따라서 ‘덕을 둔 곳’이라는 뜻에서 ‘둔덕’으로 불렀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 때문인지 현재 이 마을 주민 중 공무원 등 공직자가 100여 명에 이른다. 그래서 ‘둔덕’은 ‘밥둔덕’으로 부르고, 이웃 ‘염실’은 한학을 한 사람이 많다고 해서 ‘글염실’로 부른다. 그러나 ‘둔덕’은 매우 흔한 지명으로, 그 대부분은 ‘둔덕’의 원 의미 그대로 풀이한다. ‘둔덕’은 ‘두두룩하게 둔진 곳’이니, 마을이 둔덕처럼 높직한 곳에 자리 잡고 있을 때 이 이름이 주로 붙는다. 둔덕은 다시 네 개의 작은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한내’는 ‘둔덕’ 입구 503번도로 가에 있는 마을이다. 삼기천 물가에 약수가 나와 청주ㆍ청원ㆍ괴산 사람들이 모여들어 상가가 성황을 이루었다. ‘한내’는 ‘큰 내’의 뜻으로, 삼기천 물가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실제로 ‘(주)디엔피’의 자리에 ‘(주)진로’에서 운영하던 ‘진로석수’ 공장이 있었다. ‘미륵당(彌勒堂)’ 또는 ‘미륵댕이[彌勒堂-]’는 ‘염실’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민속박물관 남쪽 언덕에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08호인 남하리석조미륵보살입상(南下里石造彌勒菩薩立像)이 있다. 석조미륵보살상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중간말’은 ‘둔덕’ 중앙에 있는 마을로, 마을회관이 있다. ‘큰말’은 ‘둔덕’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현재 민속박물관 위쪽 주변 마을이다. 도덕골1 : ‘큰말’에서 내성리 방향으로 넘어가는 골짜기이다. ‘도덕골’은 ‘도덕’과 ‘골’로 나뉜다. 전국적으로 ‘도덕골’ㆍ‘도둑골’ㆍ‘도독골’은 섞여 쓰이면서 여러 가지 유래담이 관련되어 있다. 특히 ‘도둑골’은 ‘도둑’과 관련하여 ‘도둑이 숨기에 좋을 만큼 후미진 골짜기’로 설명한다. 그러나 ‘도둑골’이 ‘도둑’과 관련되는지는 의문이다. ‘도덕골’이 ‘도둑골’ㆍ‘두둑골’ㆍ‘도둔골’이 함께 쓰이고 있음을 볼 때, ‘도덕’은 ‘돋우다’ㆍ‘두둑’과 관련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렇다면 ‘도덕’은 ‘두두룩한’으로 이해되어 ‘도덕골’은 ‘두두룩한 형상을 하고 있는 골짜기’로 풀이해 볼 수 있다. 골짜기가 깊지 않고 두둑하게 올라와 있는 형상이어서 붙은 이름으로 추정된다. 둔덕들 : ‘한내들’과 남하1리 ‘포천이들’ 사이에 있는 들이다. ‘둔덕들’은 ‘둔덕’과 ‘들’로 나뉘며, ‘둔덕 마을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뒷골모랭이 : ‘(주)대유통신’ 부근에 있는 모퉁이이다. 뒤로 돌아가면 ‘솔모루’가 보인다. ‘뒷골모랭이’는 ‘뒷골’과 ‘모랭이’로 나뉘고, ‘뒷골’은 ‘뒤’와 ‘골’이 사이시옷으로 연결된 어형이다. ‘모랭이’는 ‘모퉁이’의 방언형이므로, ‘뒷골모랭이’는 ‘뒤쪽 골짜기로 돌아가는 모퉁이’로 풀이된다. 미륵들(彌勒-) : ‘미륵당’ 북동쪽에 있는 들이다. ‘미륵들’은 ‘미륵’과 ‘들’로 나뉘며, ‘미륵이 있는 들’로 풀이된다. 이 들은 ‘미륵당’과 ‘둔덕’ 사이에 있는데, ‘미륵당’ 마을이 이 들에 형성되었다. 밤나무들 : ‘한내’ 북서쪽에 있는 들이다. ‘밤나무들’은 ‘밤나무’와 ‘들’로 나뉘며, ‘밤나무가 많이 자라는 들’로 풀이된다. 이 들에는 예전에 밤나무가 많았다. 방죽골 : ‘둔덕’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방죽골’은 ‘방죽’과 ‘골’로 나뉘며, ‘방죽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비석거리(碑石-) : ‘둔덕’ 남쪽에 있는 거리이다. ‘비석거리’는 ‘비석’과 ‘거리’로 나뉘며, ‘비석이 있는 거리’로 풀이된다. 열부(烈婦) 광산김씨(光山金氏)의 비석이 서 있는 곳이다. 사장대(射場垈) : ‘둔덕’에서 동북쪽에 있는 산이다. ‘둔덕들’에서 증천3리로 가는 곳에 있다. ‘사장대’는 한자 지명으로 ‘사장대(射場垈)’이다. 따라서 ‘활터’로 풀이된다. 다만 ‘터’를 뜻하는 ‘장’과 ‘대’가 겹쳐 쓰인 유의중복 어형으로 볼 수 있다. 사장들(射場-) : 남하1리와 내성리 사이에 있는, 황토 질흙으로 된 들이다. 비가 오면 장화를 신고 다녀야만 했다. ‘사장들’은 ‘사장’과 ‘들’로 나뉘며, ‘사장’은 ‘활터’를 뜻한다. 따라서 ‘사장들’은 ‘활터가 있는 들’로 풀이된다. 삼선골 : ‘왁박골’[남하3리 골짜기] 북쪽 골짜기로, ‘서당골’ 가기 전에 있다. ‘삼선골’은 ‘삼선’과 ‘골’로 나뉜다. ‘삼선’은 ‘삼신’의 변화형으로 추정된다. ‘삼신’은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인간세상에서 아기의 많고 적음과 있고 없음, 그리고 해산을 주관하는 신’을 말한다. 일명 ‘삼신할머니’ㆍ‘산신(産神)’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삼선골’은 ‘삼신을 모시는 곳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서녘골 : ‘둔덕’ 남쪽에 있는 들이다. ‘서녘골’은 ‘서녘’과 ‘골’로 나뉘며,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서쪽으로 해가 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당골(書堂-) : ‘미륵댕이’ 남쪽으로 ‘소롱굴골’ 부근에 있는 골짜기이다. ‘서당골’은 ‘서당’과 ‘골’로 나뉘며, ‘서당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선녀골(仙女-) : ‘황아골’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선녀골’은 ‘선녀’과 ‘골’로 나뉘며, ‘선녀가 내려와 노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소롱굴골 : ‘미륵댕이’에서 ‘남대산’으로 오르는 골짜기이다. ‘소롱굴골’은 ‘소롱골골’의 변화형이다. 즉 골짜기를 뜻하는 ‘골’이 겹쳐 쓰인 유의중복 어형이다. ‘소롱골’은 ‘소롱’과 ‘골’로 나뉜다. 여기서 ‘소롱’의 뜻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소롱골’은 전국적으로 발견되는 지명으로, 대개 외진 곳에 있으면서 공간이 좁은 것이 특징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소롱골’은 ‘솔은골’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솔은’은 ‘솔다’의 관형사형이요, ‘솔다’는 ‘공간이 좁다’를 뜻한다. 이런 추정이 사실이라면, ‘소롱골’ 또는 ‘소롱굴골’은 ‘공간이 좁은 골짜기’로 풀이된다. 소징이들[-亭-] : ‘사장대’ 옆에 있는 들판이다. ‘소징이들’은 ‘소징이’와 ‘들’로 나뉜다. ‘소징이’는 ‘소정(-亭)’에 접미사 ‘이’가 붙은 ‘소정이(-亭-)’의 변화형이다. 즉 ‘소정이’가 이모음역행동화에 의해 ‘소젱이’가 되고, 모음변동에 의해 ‘소징이’로 실현된 것이다. ‘소정’은 ‘솔정(-亭)’에서 치조음 ‘ㄹ’이 탈락한 어형이다. ‘솔정’은 ‘소나무 정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소정이’나 변화형 ‘소징이’는 ‘소나무 정자가 있는 곳’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소징이들’은 ‘소나무 정자가 있는 들’로 풀이된다. 오얏고지 : ‘비석거리’ 위쪽에 있는 산이다. ‘오얏고지’는 ‘오얏’과 ‘고지’로 나뉘며, ‘고지’는 ‘곶’에 접미사 ‘이’가 결합된 어형이다. ‘오얏’은 ‘자두’를 뜻한다. ‘곶’은 원래 ‘바다나 호수로 뾰족하게 내민 땅[串ㆍ岬]’이나 약간의 의미 변화가 일어나 ‘들판 쪽으로 산등성이가 쭉 뻗어 나온 곳’을 뜻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얏고지’는 ‘자두나무가 있는, 들판 쪽으로 쭉 뻗어 나온 산등성이’로 풀이된다. ‘곶’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용강2리 ‘꽃산구링이’를 참고하기 바란다. 웃골 : ‘큰말’에서 ‘수덕사’[절]를 지나 남대산 고개에 이르는 골짜기이다. ‘웃골’은 ‘위’의 변화형 ‘웃’과 ‘골짜기’를 뜻하는 ‘골’로 나뉘며, ‘위쪽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고개를 넘으면 청원군 북이면 송정리로 이어진다. 6ㆍ25 전쟁 시 피난지이기도 했다. 2007년에 증평군에서 ‘인삼로드’라 명명하고 길과 옹달샘을 잘 정비해 놓았다. 이 옹달샘은 가물거나 비가 와도 항상 수량이 변함없고 물맛이 좋다. 그리고 그 물을 먹으면 소원이 다 이루어진다고 해서 증평읍내 사람들과 인근 마을 사람들이 와서 지금도 치성을 드리고 있다. 독립유공자 이찬 묘소가 절터에 이르는 오른쪽에 있다. 절터 : ‘웃골’에 있는 절터이다. ‘절터’는 ‘절’과 ‘터’로 나뉘며, ‘절이 있는 터’로 풀이된다. 6ㆍ25 전쟁 전에 ‘성주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통뫼(桶-) : ‘둔덕’에 있는 작은 산으로, 홍수에 떠내려 왔다는 전설이 있다. ‘들노래축제’의 행사장 부근에 있다. ‘통뫼’는 ‘통’과 ‘뫼’로 나뉜다. 여기서 ‘통’은 ‘통(桶)’으로, ‘어떤 물질을 담을 수 있도록 나무ㆍ금속ㆍ플라스틱 등으로 깊이가 있게 만든 물건’을 뜻한다. ‘뫼’는 ‘산(山)’을 뜻한다. 따라서 ‘통뫼’는 ‘통을 엎어 놓은 듯 둥그렇게 생긴 산’으로 풀이될 수 있다. ‘미’ㆍ‘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송산2리 ‘안자산2’를 참고하기 바란다. 한내들 : ‘한내’ 남쪽에 있는 들로, 삼기천과 닿아 있다. ‘한내들’은 ‘한내’와 ‘들’로 나뉘며, ‘한내마을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황새말골 : ‘삼선골’과 ‘서당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황새말골’은 ‘황새말’과 ‘골’로 나뉘며, ‘황새 마을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황아골[-鶴-] : ‘큰말’ 북쪽, 남하3리의 ‘도덕골2’와 ‘선녀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황아골’은 ‘황학골’의 변화형으로 추정된다. ‘황학골’은 ‘황학’과 ‘골’로 나뉜다. ‘황학’은 ‘황새’로 풀이되어, ‘황학골’은 ‘지형이 황새목처럼 긴 골짜기’나 ‘황새가 많이 서식하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 남하3리(南下三里) : ㆍ염실(廉室)/염곡(廉谷)/글염실 : 남하3리 전체는 ‘염실’ㆍ‘염곡’ㆍ‘글염실’로 불린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에 ‘염실’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789년 이전부터 ‘염실’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 ‘염실’과 관련된 근세 기록은 없고,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寒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와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 ‘염곡(?谷)’이 보인다. ‘글염실’은 남하2리 ‘둔덕’을 ‘밥둔덕’으로 부르는데 반해, 이웃 ‘염실’은 한학을 한 사람이 많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염곡’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등 조선시대 각종 기록에 보이는 ‘염곡소(念谷所)’의 터로 추정된다. 소(所)는 고려 및 조선시대의 말단 기구인 향소부곡(鄕所部曲)을 말하는 것이다. 향소부곡은 고려시대의 행정구역 중에서 주(州)ㆍ목(牧)ㆍ군(郡)ㆍ주현(州縣)ㆍ속현(屬縣) 같은 일반 행정구역과는 달리 특수행정구역이다. 소(所)는 고려 때 금(金)ㆍ은(銀)ㆍ동(銅)ㆍ철(鐵)ㆍ실[絲]ㆍ옷감[紬]ㆍ종이[紙]ㆍ먹[墨] 같은 수공업품(手工業品)과 차(茶)ㆍ생강(生薑)ㆍ수산물(水産物) 같은 물품 등 공부(貢賦) 부담을 위한 특정한 물품을 생산하던 촌락(村落)이다. 향(鄕)과 부곡(部曲)이 신라 때부터 존재했던 것과는 달리, 소(所)는 고려시대에 들어와 처음 발생했다. 소에 속한 주민들의 신분은 공장(工匠)이었다. 소(所)는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공물을 생산하는 지역이다. 그 생산물의 종류에 따라 금소(金所)ㆍ은소(銀所)ㆍ동소(銅所)ㆍ철소(鐵所)ㆍ사소(絲所)ㆍ주소(紬所)ㆍ지소(紙所)ㆍ와소(瓦所)ㆍ탄소(炭所)ㆍ염소(鹽所)ㆍ묵소(墨所)ㆍ자기소(瓷器所)ㆍ어량소(魚梁所)ㆍ강소(薑所)ㆍ다소(茶所)ㆍ밀소(蜜所) 등이 있다. 소(所)는 공물의 확보를 위해 정책적으로 설정된 지역이다. 소는 군현제하의 촌락을 기초로 하면서 정부가 필요로 하는 특정물품을 전업적(專業的)으로 생산하거나 이에 상당하는 물품의 대납을 위한 역을 전담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군현제하의 일반 촌락과는 구별됐다. 소(所)의 주민은 전문 기술자인 장인(匠人)과 장인의 물품 생산을 돕기 위한 각종의 역(役)을 부담하는 금호(金戶)ㆍ은호(銀戶)ㆍ염호(鹽戶)ㆍ묵호(墨戶) 등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일반 촌락민(村落民)으로서 신분적으로는 양인이었다. 이들은 특정 물품을 생산하기 위해 요역(?役)의 형태로 동원됐다. 이들 소(所)의 주민에게 부과되는 역(役)) 자체가 과중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어서 일반 백성들이 이를 꺼리고 회피해 일반 군민(郡民)이나 현민(縣民)과는 차별을 받았다. 이 때문에 소(所)의 주민이 공을 세웠을 때에는 포상의 의미로써 일반 군현으로 승격시켜 주는 조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소(所)는 과중한 수탈로 인해 해당 주민들이 도망가면서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해 갔다. 이에 따라 중앙정부는 종래 소(所)에서 생산되던 물품을 군현제하의 주민을 동원하여 생산하게 되었다. 12세기 이후 권세가에 의해 수탈된 농민들을 현 거주지에서 공호(貢戶)로 편적한 것은 종래의 본관제(本貫制)를 기초로 해 실현됐던 부곡제적인 수취 체제가 단일화되어 가는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러한 수취 체제의 변동과 아울러 소(所)는 점차 해체되었다. 즉 일반 군현으로 승격되거나 기존 군현의 일부로 흡수되었고, 조선 초기에 군현제가 정비되면서 대부분 소멸됐다. 염곡소(念谷所)가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중종 25년, 1530)이다. 이 문헌에도 염곡소는 고적조(古跡條)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때에는 이미 염곡소 자체가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전의 문헌으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단종 2년, 1454)에는 염곡소의 기록은 없다. 따라서 염곡소는 14세기에 이미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염곡소는 청당현(靑塘縣)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청당현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태조(太祖)) 5년(1396)에 청당현과 도안현(道安縣)의 백성이 적고 땅이 좁아 두 현을 합쳐 청안(靑安)으로 명칭을 고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염곡소(念谷所)가 위치했던 청당현이 1396년에 폐지되었기 때문에 이 현에 위치하고 있던 염곡소도 1396년 이전에 폐지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염곡소(念谷所)가 폐지된 후 ‘염곡(念谷)’이 ‘염곡(廉谷)’ 또는 ‘염실(廉實)’로 변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염곡소가 존치할 당시의 역할에 대해서는 정확한 고증은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철 종류의 제품을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부터 이 마을에서 일할 때 부르는 노동요가 『한국민요대전(韓國民謠大典)』(1989∼1995)에서 볼 수 있는 주일종 씨[1921년생, 작고]의 ‘모심는 소리’ㆍ‘모찌는 소리’ 등이다. 염곡소 등 고려 및 조선시대 향소부곡(鄕所部曲)이 위치한 곳은 대체적으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에 해당하므로 조선 중기 이후 명문거족(名門巨族)들이 대거 낙향했다. ‘염실’은 북쪽에 있는 ‘뒷골’[1반], 동쪽에 있는 ‘앞골’[2반], 남쪽 남대산 밑에 있는 ‘웃말’[3반]로 나뉜다. 남하소류지(南下小溜池) : ‘염실’ 남쪽에 있는 못으로, 1945년에 축조되었다. ‘남하소류지’는 ‘남하’와 ‘소류지’로 나뉘며, ‘남하리에 있는 못’으로 풀이된다. 도덕골2 : ‘염실’ 서쪽으로 ‘재너머골’과 ‘왁박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약 4km의 깊은 골짜기이다. ‘웃말’에서 ‘도덕골2’를 지나 ‘돌팍재’를 넘으면 청원군 북이면 송정리이다. 옛날 도보가 주 교통수단일 때 청주ㆍ청원군 북이면 사람들이 괴산장ㆍ청안장ㆍ청안초등학교를 왕래하던 가장 가까운 주 통로였다. 여기에는 일제강점기 금강석을 캐던 금정굴이 있었고 ‘왁박골’에는 대단히 큰 ‘둥둥바위’가 있다. ‘둥둥바위’ 위에서 보면 동북쪽으로 백마산ㆍ보강산이, 동쪽으로 칠보산이, 동남쪽으로 좌구산ㆍ구석산이 있다. ‘둥둥바위’ 밑은 넓고 깊어 여름이면 시원하고 겨울이면 훈훈해 이 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공주판관을 지낸 초계 주명흠이 1640년경에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관직을 사양하고 ‘염실’에 낙향해 기거할 때 이 길목에 하마석(下馬石: 증평군향토유적 제13호)을 세워놓고 말에서 내렸으며, 주명흠 장군을 찾아오는 방문객들도 하마석을 이용했다고 한다. 청주 방면과 청안 방면과의 동서로 통하는 ‘길 중에 가장 가까운 길은 오직 이 길이다’라는 뜻으로 길 도(道), 홀로 독(獨) 을 써서 ‘도독골(道獨-)’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도둑골’ 또는 ‘도덕골’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주명흠 장군은 1693년 7월에 죽어 ‘염실’ 뒷산에 묻혔다. 그리고 하마석 또한 1702년 8월 15일에 후손들이 비를 세우면서 묘소 입구에 옮겨 놓았다. 그러나 ‘도덕골’에 대한 설명은 달리 할 수도 있다. ‘도덕골’은 ‘도덕’과 ‘골’로 나뉜다. 전국적으로 ‘도덕골’ㆍ‘도둑골’ㆍ‘도독골’은 섞여 쓰이면서 여러 가지 유래담이 관련되어 있다. 특히 ‘도둑골’은 ‘도둑’과 관련하여 ‘도둑이 숨기에 좋을 만큼 후미진 골짜기’로 설명한다. 그러나 ‘도둑골’이 ‘도둑’과 관련되는지는 의문이다. ‘도덕골’이 ‘도둑골’ㆍ‘두둑골’ㆍ‘도둔골’이 함께 쓰이고 있음을 볼 때, ‘도덕’은 ‘돋우다’ㆍ‘두둑’과 관련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렇다면 ‘도덕’은 ‘두두룩한’으로 이해되어 ‘도덕골’은 ‘두두룩한 형상을 하고 있는 골짜기’로 해석해 볼 수 있다. 골짜기가 깊지 않고 두둑하게 올라와 있는 형상이어서 붙은 이름으로 추정된다. 돌팍재 : ‘염실’ 서남쪽에 있는 고개로, 남대산 능선에 있다. ‘선반다리고개’ 남쪽에 있으며, 과거 청원군 북이면 광암리로 갈 때 이용되었다. ‘돌팍재’는 ‘돌팍’과 ‘재’로 나뉜다. ‘돌팍’은 ‘돌’의 방언형이니, ‘돌팍재’는 ‘돌로 되어 있는 고개’로 풀이된다. 이곳에는 크고 작은 돌과 지네가 많았다. 둥둥바위 : ‘도덕골2’ 내의 ‘왁박골’에 있는 바위로, 크기는 5m×8m이다. 바위가 둥글고 지면에서 높이 떠 있어 ‘둥둥바위’라 불렸다. 인근 마을 사람들이 국난이 있을 때마다 바위 밑을 피난처로 이용하기도 했다. 지금은 남하리 사람들의 천렵과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먹골 : ‘염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먹골’은 ‘먹’과 ‘골’로 나뉜다. ‘먹’은 다양하게 해석된다. ‘묵(墨)’으로 보아, ‘먹을 만들던 골짜기’나 ‘흙빛이 검은 골짜기’로 풀이된다. ‘목’의 변화형으로 보아, ‘길목에 있는 골짜기’나 ‘못 위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막다[塞]’의 어간 ‘막’의 변화형으로 보아, ‘마지막 골짜기’나 ‘막힌 골짜기’로 풀이된다. 선반다리고개 : ‘염실’ 서쪽에 있는 고개로, 남대산 능선에 있다. ‘돌팍재’ 북쪽에 있으며, 과거 청원군 북이면 송정리로 갈 때 이용되었다. ‘선반다리고개’는 ‘선반다리’와 ‘고개’로, ‘선반다리’는 다시 ‘선반’과 ‘다리’로 나뉜다. ‘다리’는 ‘들[野]’을 뜻한다. ‘들’은 지역에 따라서는 ‘달’ㆍ‘다리’로 실현된다. 실제로 ‘방아다리’ㆍ‘방아달’이 ‘방아들’과 함께 쓰이는 곳이 있다. 따라서 ‘선반다리고개’는 ‘선반처럼 펑퍼짐하게 생긴 들에 있는 고개’로 풀이된다. ‘다리’가 ‘들’과 관련됨은 덕상1리 ‘선반드리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염태텃논골[念-] : ‘염실’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남하3리노인정이 있다. ‘염테텃논골’은 ‘염태’와 ‘텃논골’로 ‘텃논골’은 다시 ‘텃논’과 ‘골’로 나뉜다. ‘염태’는 ‘염터’를 뜻하니, ‘염태텃논골’은 ‘염터 가까이에 있는 논 골짜기’로 풀이된다. 왁박골[岳-] : ‘도덕골2’ 내에 있는 작은 골짜기이다. ‘왁박골’은 ‘악박골[岳-]’의 변화형으로, ‘악바위[岳岩]가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이 골짜기에는 ‘둥둥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악암’ 즉 ‘산 바위’이다. 재너머골 : ‘염실’에서 ‘둔덕’으로 가는 작은 능선 너머에 있는 들이다. ‘재너머골’은 ‘재너머’와 ‘골’로, ‘재너머’는 다시 ‘재’와 ‘너머’로 나뉜다. 여기서 ‘재’는 ‘장재’로, ‘재너머골’은 ‘장재 너머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장재’는 ‘염실’에서 증평장과 농경지 경작을 위해 이용한다. 지척골(咫尺-) : ‘웃말’에서 뒷산 남대산으로 오르는 작은 골짜기이다. ‘지척골’은 ‘지척’과 ‘골’로 나뉘며, ‘마을 가까이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 남하4리(南下四里) : ㆍ서당골(書堂-) : 남하3리 ‘염실’ 동남쪽, 삼보산 기슭에 있는 마을이다. 남하4리마을회관에서 남쪽으로 죽리와 접해 있는 마을이다. 안렴사 김사렴(金士廉)의 증손인 죽헌공(竹憲公) 김규(金?)가 연산군 1년(1495)에 삼보산 기슭에 모정(茅亭)으로 된 서당을 짓고, 그 후 중종 2년(1507)에 정식으로 서당을 지어 인근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때부터 이 마을에는 8ㆍ15 광복이 될 때까지 서당이 있어서 ‘서당골’로 불렀다. 마지막 서당을 지켜온 사람은 김수연 씨[작고]이다. ‘솔모루’와 함께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집성촌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에는 ‘서원리(書院里)’가 보이는데, 이 마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의 ‘서동(書洞)’으로 불리던 곳이다. ㆍ염골(念-) : ‘서당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현재 3호가 있다. ‘매산소류지’ 위에서 남대산으로 가는 골짜기에 있다. ‘작은깊은골’과 ‘큰깊은골’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염골’도 위 ‘염실’과 같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등 조선시대 각종 기록에 보이는 ‘염곡소(念谷所)’와 관련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소(所)는 고려 및 조선시대의 말단 기구인 향소부곡(鄕所部曲)을 말하는 것이다. 소(所)는 고려 때 금(金)ㆍ은(銀)ㆍ동(銅)ㆍ철(鐵)ㆍ실[絲]ㆍ옷감[紬]ㆍ종이[紙]ㆍ먹[墨] 같은 수공업품(手工業品)과 차(茶)ㆍ생강(生薑)ㆍ수산물(水産物) 같은 물품 등 공부(貢賦) 부담을 위한 특정한 물품을 생산하던 촌락(村落)이다. ㆍ새터말/신기(新基) : 남하1리 ‘양지말’ 남쪽에 새로 만들어진 마을이다. 남하4리마을회관이 있고 ‘염실’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다. 150여 년 전에 ‘염실’로 들어오는 어귀에 새로운 집이 한 두 가구씩 들어서면서 형성됐다고 해서 ‘새터말’로 불렸다. 달리 ‘신기’로도 불리는데, 이는 ‘새터말’을 한자로 옮긴 이름이다. 개부리골/개부지골 : ‘탑바위’에서 남대산을 오르는 골짜기이다. 고개를 넘으면 청원군 북이면 부연리이며, 민간 공사용 폭파 화약고가 있다. ‘개부리골’은 ‘개’와 ‘부리’로 나뉜다. ‘부리’는 백제어 ‘夫里’(*부리)에 소급되는데, 고구려어 ‘忽’(*홀ㆍ*골)이나 신라어 ‘火ㆍ伐’(*불)과 동계어로 추정된다. 백제어 ‘부리’는 본래 ‘성(城)’이나 ‘동(洞)’을 뜻하는 말이다. 다만 현대 지명에서는 의미변화가 일어나, 대개는 ‘산부리, 즉 산의 어느 부분이 부리같이 쑥 내민 곳’을 뜻하게 된다. 이런 설명에 따르면, ‘개뿌리’는 ‘개 모양으로, 산의 어느 부분이 부리같이 쑥 내민 곳’으로 풀이된다. 달리 ‘개부지골’로도 불리는데, 이는 ‘개부리골’의 변화형으로 추정된다. ‘부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송산2리 ‘모종뿌리’를 참고하기 바란다. 갈궁절골/갈궁자리골 : ‘서당골’에서 죽리를 가다 보면 삼보사(三寶寺)와 안동김씨사당으로 가는 세 갈래 길이 나온다. 이 주변을 ‘갈궁절골’ 또는 ‘갈궁자리골’로 부른다. ‘갈궁사(葛宮寺)’라는 절이 있어 붙은 이름인데, 이 절은 해방 이후 사라졌다. 그러나 지금도 기와조각 등 절터 흔적이 남아 있다. 경기골(境基-) : ‘새터말’과 ‘염실’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경기골’은 경기와 골로 나뉜다. ‘경기’는 ‘경기(境基)’로 ‘경계가 되는 터’를 뜻한다. 따라서 ‘경기골’은 ‘경계 터가 되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귀골/구수동(-洞) : ‘염골’ 남쪽 앞에 보이는 작은 능선 주변이다. 남대산으로부터 ‘탑바위’를 지나 내려온 능선이다. 이곳에 1870년대 쯤 터를 잡고 향교를 세우려 했으나 건립하지는 못했다. 향교에는 선비 등 귀한 손님이 오는 곳이라 하여 ‘귀골’이라 불렸다고 전한다. 그러나 ‘귀골’은 ‘구이골’의 변화형으로 추정된다. ‘구이골’은 ‘구이’와 ‘골’로 나뉘는데, ‘구이’는 ‘구?’로 소급하며, ‘구?’는 ‘구유’를 뜻한다. 즉 ‘구?>구이>귀’의 변화를 겪은 것이다. ‘구유’는 ‘소나 말 따위 가축의 먹이 그릇’으로, 길쭉한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귀골’은 ‘구유처럼 길쭉한 골짜기’로 풀이된다. 달리 ‘구수동(九水洞)’으로도 불린다. ‘구수’는 ‘구유’의 방언형이니 ‘구수동’은 ‘귀골’과 그 뜻이 같다. 이곳은 초계주씨들의 선영(先塋)이다. 따라서 ‘염실’에 집성을 이루고 사는 초계주씨(草溪周氏)는 ‘판관공파’이나 종친에서는 통상 ‘구수동파’ 또는 ‘귀골파’로 부르고 있다. 매산(-山) : ‘염골’ 남쪽에 있는 산으로, 삼보산 줄기이다. ‘매산’은 봉우리가 매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이라 전한다. 그러나 전국에 ‘매산’이나 ‘매봉’이라는 이름이 아주 흔한데, 같은 뜻인 ‘매’와 ‘산’의 유의중복 어형이다. 따라서 ‘매산’은 ‘매처럼 생긴 산’이라기보다는, 그저 ‘산’으로 해석될 수 있다. ‘미’ㆍ‘뫼’ㆍ‘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송산2리 ‘안자산2’를 참고하기 바란다. 매산소류지(-山小溜池)/염골소류지(-念-小溜池) : ‘염골’에 있으며 1941년에 착공해 1943년에 완성된 저수지이다. 면적이 10,510m2(3,180평)로, 삼보산에서 내려온 ‘매산’ 능선 아래 있다고 해서 ‘매산소류지’로 불린다. 달리 ‘염골소류지’로도 불리는데, 이는 ‘염골’에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모퉁이골 : ‘서당골’에서 죽리로 가는 안동김씨사당 입구의 산모퉁이를 말한다. ‘모퉁이골’은 ‘모퉁이’와 ‘골’로 나뉘며, ‘모퉁이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속리들(-里-) : ‘서당골’ 앞에 있는 들이다. ‘속리들’은 ‘속리’와 ‘들’로 나뉜다. ‘속리’는 ‘속리(-里)’로 ‘마을 안쪽’을 뜻한다. 따라서 ‘속리들’은 ‘마을 안쪽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수옥들 : ‘매산소류지’ 밑에 있는 들로, 논과 밭으로 되어 있다. ‘매산소류지’ 위쪽의 ‘평박골’에 사시사철 맑은 물이 솟아올라 가뭄이 와도 농사를 지울 수 있는 옥답(沃畓)이라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 전한다. 즉 ‘수옥’을 ‘수옥(水玉)’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수옥들’을 달리 풀이할 수도 있다. ‘수옥들’은 ‘수옥’과 ‘들’로 나뉜다. 여기서 ‘수옥’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지명에 흔히 보이는 ‘수녹’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부요소 ‘수녹’은 전국적으로 ‘수녹’을 비롯하여, ‘수노’ㆍ‘수놋’ㆍ‘수누’ㆍ‘수눅’ㆍ‘수눗’ㆍ‘수늣’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들은 ‘고개[嶺]’를 뜻하는 ‘수늙’의 변형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수옥들’은 ‘고개가 있는 들’로 풀이된다. 염태고개[念-] : ‘염태골’ 남쪽에 있는 고개이다. 북이면 선암2리 ‘황방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반대로 보면, ‘염태고개’를 넘으면 증평읍 남하4리 ‘염태골’에 이른다. ‘염태골’을 지나면 남하4리 ‘염골’[마을]에 이르고, ‘염골’을 지나면 남하3리 ‘염실’[마을]에 이른다. ‘염태고개’는 ‘염태’와 ‘고개’로 나뉘며, ‘염태골에 있는 고개’로 풀이된다. 염태골[念-] : ‘염골’에서 ‘귀골’을 지나 ‘염태고개’에 이르기까지의 골짜기이다. ‘큰깊은골’과 ‘작은깊은골’ 동쪽에 있다. ‘염태골’은 ‘염태’와 ‘골’로 나뉜다. ‘염태’는 ‘염터’를 뜻하니, ‘염태골’은 ‘염터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작은깊은골 : ‘귀골’에서 ‘염태고개’로 가다가 남대산에 오르는 ‘탑선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작은깊은골’은 ‘작은’과 ‘깊은골’로, ‘깊은골’은 다시 ‘깊은’과 ‘골’로 나뉜다. 따라서 ‘작은깊은골’은 ‘깊은골 중 작은 골짜기’로 풀이된다. ‘큰깊은골’과 대비적으로 붙인 이름이다. 큰깊은골 : ‘작은깊은골’의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큰깊은골’은 ‘큰’과 ‘깊은골’로, ‘깊은골’은 다시 ‘깊은’과 ‘골’로 나뉜다. 따라서 ‘큰깊은골’은 ‘깊은골 중 큰 골짜기’로 풀이된다. ‘작은깊은골’과 대비적으로 붙인 이름이다. 탑바위(塔-)/탑선이(塔-) : ‘염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과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 ‘塔洞’으로만 기록된 곳이다. 이곳은 ‘남하리사지(南下里寺址)’로, 남하리삼층석탑(南下里三層石塔: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41호)과 남하리사지마애불상군(南下里寺址磨崖佛像群: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97호)이 남아 있다. 삼층석탑이 큰 자연암반 위에 세워져 있어 ‘탑바위’ 또는 ‘탑선이’라 부른다. 전국적으로 ‘탑산이’ 또는 ‘탑선이’란 지명은 매우 많은데, 이들은 모두 ‘탑이 서 있다’와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탑선이’는 ‘탑 서다’의 관형사형 ‘탑 선’에 접미사 ‘이’가 붙어 형성된 말로, ‘탑이 서 있는 곳’이란 뜻이 된다. 이것이 한자화하는 과정에서 ‘탑선’의 ‘선’이 ‘선(仙’)이나 ‘산(山)’으로 변해 ‘탑선(塔仙)’ 또는 ‘탑산(塔山)’이 된다. 지금도 ‘탑바위’ 주변에는 돌과 기왓장 조각 등 절터의 흔적이 있다.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는 탑바위는 흡사 병풍 모양을 하고 있으며, 앞에는 작은 샘이 있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부녀자들이 탑바위에 치성을 드리면 반드시 아들을 얻는다는 영험담(靈驗譚)이 있어, 오늘날에도 기자치성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괴산문화원 1999). 평박골[屛-] : ‘매산소류지’ 위 왼쪽에 있는, 삼보산 기슭에 있는 골짜기이다. ‘평박골’은 ‘평박’과 ‘골’로, ‘평박’은 다시 ‘평’과 ‘박’으로 나뉜다. 여기서 ‘평’은 ‘병풍(屛風)’의 방언형 ‘평풍’이고, ‘박’은 ‘바위’의 방언형이다. 따라서 ‘평박골’은 ‘병풍바위가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이 골짜기는 병풍바위 아래에 있으며,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 문화재 ]

ㆍ남하리사지(南下里寺址) : 남하4리 산35-2번지에 있는 절터이다. 약 5,000㎡의 넓이의 일명사지(逸名寺址)로, 신라 후대∼고려 초기의 절터로 추정된다. 남하리사지는 남대산을 배경으로 동향한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좁은 계곡의 경사면에 불당과 요사채를 세우고 향화(香火)를 밝혔던 작은 암자 터일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삼층석탑과 5구의 마애불상군이 조각되어 전하고 있다. 남하리사지의 불교유적은 물론, 삼층석탑과 마애불상군에 대한 고문헌 기록은 전혀 찾을 수가 없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1942)의 사지에 대한 최초의 조사보고서에도 삼층석탑에 대한 소개만 있을 뿐, 마애불상군에 대한 언급은 없다. 또한 『전국유적목록(全國遺蹟目錄)』(1971)에는 석탑과 함께 삼보사(三寶寺)의 석불과 마애삼존불이 기록되어 있으나, 자세한 내용은 없다. 위의 두 책을 보완하여 기술한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攬)』(1976)에는 삼층석탑을 설명하는 말미에. “이 탑의 후측(後側) 20m 지점에 높이 3.6mㆍ폭 4.6mㆍ두께 2.7m의 4각형 암석이 있고, 그 전면에 중앙본존불(中央本尊佛)과 좌ㆍ우협시불(右脇侍佛)의 3구(三軀)가 조각되어 있다.”고 하여 5구의 마애불상들 가운데 중앙에 위치한 삼존불상에 대해서만 간략히 기술하였다. 단국대학교박물관의 『괴산지구고적조사보고서(槐山地區古蹟調査報告書)』(1967)의 삼보사 유적에 대한 조사에서 삼층석탑과 함께 마애삼존석불입상과 마애석불입상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는데, 삼존불 남쪽의 마애반가상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어 당시는 이 마애불상을 확인하지 못한 듯하다. ㉮ 남하리사지삼층석탑(南下里寺址三層石塔) :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한 4.4m×3.4m×1.7m 크기의 암반 위에 한 면의 길이 108cm, 높이 35cm의 네모난 대석(臺石)을 놓고 높이 165cm의 3층으로 쌓은 석탑이다. 이는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9세기 말∼10세기 초]에 조성되었으며, 1984년 12월 31일에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41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대석의 윗면이나 옆면은 물론 탑신(塔身)에는 우주(隅柱)와 탱주(幀柱) 등 아무런 조식이 없어 단조로움을 주고 있다. 1층 탑신의 한 모서리 위에는 암석에서 쪼아낸 흔적이 남아있고, 1층 탑신에 비해 2층 탑신의 높이가 급격히 낮아졌다.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은 각각 별도의 돌로 조성되었는데, 2층 탑신만은 1층 옥개석과 하나의 돌로 되어 있어 고려시대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옥개석 아래 옥개받침은 모두 3단으로 되어 있으나 각 층의 윗면에는 탑신받침이 없다. 3층 옥개석 위의 상륜부에는 노반(露盤)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데 지름 9.5m의 찰주공이 3층 탑신에 이르기까지 관통되어 있다. 마을 주민들의 전언에 따르면, 흉년이 드는 경우 이 노반 방향을 다르게 놓아서 비 오기를 기원하였고 또 실제로 비가 온 경우도 있었다 한다. 옛 문헌에 전하는 것이 없으나,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1942)에 “남하리 염곡(廉谷) 북서 약 100간 되는 계곡에 석탑이 있는데, 3층으로 완전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같이 자연암반에 올린 석탑의 기단 양식은 신라 하대인 9세기에 건립된 경주 남산 용장사곡삼층석탑(茸長寺谷三層石塔), 남산리동삼층석탑(南山里東三層石塔), 서악리삼층석탑(西岳里三層石塔)에서 양식적 근원을 찾을 수 있어 신라 하대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탑의 건립 위치가 넓은 시계(視界)가 가능한 높은 지대이거나 높은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하고 3m 이내의 높이로 건립한 양식 등은 고려시대에서도 찾을 수 있어 고려 초기에 조성되지 않았나 여겨지기도 한다. 1994년에 충청대학박물관의 지표조사 결과, 남하리사지3층석탑은 고려시대 인근 염곡소에서 많은 불을 다루면서 동남쪽의 높아지는 화기를 누르고 마을의 화재와 주민들의 사고를 예방하기 위하여 세웠던 일종의 비보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런 추정은 신라 하대에 확립된 산천비보(山川裨補) 사상에 의하여 고려시대에 많은 지역에 석탑을 세웠던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 남하리사지마애불상군(南下里寺址磨崖佛像群) : 1998년 12월 31일에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97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 마애삼존불입상(磨崖三尊佛立像) : 평평한 암벽면의 중앙에 본존입상을 조각하고, 그 좌우에 양협시불을 배치한 삼존불입상이다. 암면에 이끼가 많이 덮여 있고 암질이 좋지 않은데다 균열이 심하여 전체적인 불상의 모습은 어렴풋이 확인되나, 각부의 세부 양식은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양협시불은 본존불과 거의 인접하여 있는데 특히 좌협시불은 10cm 간격으로 두어 가까이 있고 우협시불은 32cm 간격을 두어 약간 떨어져 있어 특이하다. 직사각형에 가까운 암벽 면은 중앙의 본존입상 위쪽이 약간 높아 삼존을 조각하기 알맞은 형태이다. 삼존은 각기 보주형(寶珠形)으로 주변을 얕게 파내어 윤곽을 만든 내부에 낮은 돋을새김으로 조각하였는데, 삼존은 각각 방형의 대좌에 직립한 모습이다. 단 우협시불은 미완성인 듯 대좌를 조각하지 않았다. 중앙의 본존입상은 대좌에 직립한 여래입상으로 원형(圓形)의 두광(頭光)을 갖추었고 각부의 표현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소발(素髮)의 두정(頭頂)에는 위가 뾰족한 보주형(寶珠形)의 육계(肉?)가 표현되어 있고 원만한 상호(相好)에는 눈썹은 나타나지 않으나 두 눈을 지그시 감아 옆으로 길게 치켜뜬 모습이 확인된다. 코는 길게 표현하였으나 각형으로 높지 않으며 입에는 미소의 흔적이 보인다. 귀와 삼도(三道)는 본래부터 조각하지 않은 듯하다. 양 어깨는 당당한 편이며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양 어깨에 걸쳐서 양 팔과 복부 아래로 흘려내려 무릎까지 덮었는데 거의 선각(線刻)에 머물고 있으나 흉부 이하 무릎에 걸쳐서는 U자형의 의문(衣文)과 그 아래의 3, 4조의 수직선문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수인(手印)은 앞의 조사 보고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오른손은 오른쪽 어깨 밑에서 외장(外掌)한 시무외인(施無畏印)이고 왼손은 겨드랑 밑에서 손가락을 모두 펴서 아래로 향하도록 외장(外掌)한 여원인(與願人)으로 확인되어 통인(通印)을 결하였음이 밝혀졌다. 법의 자락 끝으로 두 발이 노출되어 있으나 발가락 등의 세부적인 조각은 생략되었다. 방형의 대좌는 소형으로 연판(蓮瓣) 등의 장식이 전혀 없고 윗면에 불상의 양쪽 발에 붙이어 양각하였다. 우협시불은 삼존 가운데 조각이 가장 얕게 돋을새김으로 표현되었고 마멸도 심하여 전체적으로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두부에서 어깨까지는 약간의 선각이 남아 있으나 가슴 이하의 부분은 두신(佛身)의 외곽만 겨우 확인할 수 있는 정도이다. 소발(素髮)의 머리에는 낮은 육계가 표현되었으나 마멸이 심하고 암벽의 균열로 인하여 잘 보이지 않는다. 원만형(圓滿形)의 상호(相好)에는 지그시 감은 모습을 가는 손으로 표현한 두 눈이 보이며 코는 마멸이 심하고 입은 굳게 다문 모습이 일부 남아 있다. 양 옆의 귀와 목의 삼도(三道)는 본래부터 표현되지 않은 듯하며 어깨는 당당해 보인다. 법의(法衣)는 뚜렷하지 않은데 양쪽 옆구리에서 물고기의 지느러미와 같이 길게 빼어 늘어진 옷자락이 보여 통견(通肩)이 아닐까 추정된다. 이밖의 다른 문양은 보이지 않고 발끝이나 대좌의 조각도 생략되었다. 좌협시불은 왼쪽 어깨 위와 허리 부분이 파손되어 떨어져나갔으며 두부를 제외한 조각이 불분명하다. 상호(相好)는 비교적 완전한 편으로 소발(素髮)의 두정(頭頂)에는 낮은 육계가 있다. 안면부에는 가는 눈썹과 감고 있는 두 눈의 표현이 보이고 코가 길게 나타나 있으나 입은 마멸로 뚜렷하지 않다. 양 옆의 귀와 목의 삼도(三道)는 조각되지 않았다. 어깨는 본래 당당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 왼쪽 어깨가 파손되어 있다. 법의(法衣)의 착용과 의문(衣文)은 복부 아래에 U자형이 일부 남아 있을 뿐 현재 거의 알 수 없다. 옷자락 하단부 밑에는 두 발을 약간 벌리고 서있는 모습과 방형의 대좌가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본존불보다 대좌의 높이를 약간 낮게 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마애삼존불입상은 각부의 손상과 마멸이 심하여 조각 기법을 살펴보기에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삼존불 모두에서 나타나는 원만하고 자비로워 보이는 상호의 어깨의 당당함, 그리고 우협시불의 지느러미와 같이 양 옆으로 퍼지면서 길게 늘어진 옷자락의 표현 등에서 고식의 작풍이 엿보여 주목된다. 이러한 조각 수법을 볼 때 조성 연대는 고려시대보다는 이른 통일신라 말기, 즉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의 마애불로 추정되고 있다. 실측치는 본존불입상 전체 높이 298cmㆍ두광 지름 86cmㆍ머리 높이 51cmㆍ육계 높이 14cmㆍ육계 너비 19cmㆍ얼굴 너비 42cmㆍ눈 길이 10.5cmㆍ코 길이 20cmㆍ입술 너비 13cmㆍ어깨 높이 221cmㆍ대좌 높이 31cmㆍ부조 높이 6.5cm이다. 중앙 본존불입상의 아래쪽 바닥에는 불상의 암벽 면에 붙여 방형 샘을 파 놓았으며, 주위에는 향촉대(香燭臺)와 불발(佛鉢) 등의 불기(佛器)들이 놓여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샘을 약수로 부르며 여기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이 샘물을 이용하여 공양을 드리고 식수로도 사용한다. 크기는 가로 94cmㆍ세로 68cmㆍ깊이 68cm이다. ㉡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 삼존불이 조각된 동일 암반의 북쪽 면에 부조된 불상이다. 남대산으로 오르는 길에 인접해 있어 하단부는 땅 속에 매몰되어 있다. 길가에 있어서인지 인위적인 손상을 가장 많이 입었으며 특히 눈과 코는 마멸이 심하다. 그리고 바위의 균열도 심하여 무심코 지나치면 불상이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희미한 상태이다. 마애불상을 부조한 암면이 거칠어 입상의 주변 윤곽을 음각으로 파내고 조각하였다. 바위의 면이 고르지 않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불상의 각부 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 불상의 머리는 소발이고 정수리의 육계는 암벽의 균열과 마멸로 손상이 심하다. 상호는 원만한 편이나 안면부의 눈, 코, 입, 귀는 인위적인 손상을 당하여 움푹 패여 있다. 입가에는 미소의 흔적이 어렴풋이 나타나 있고 머리 둘레에는 보주 모양의 두광이 굵은 음각선으로 표현되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없어 짧아 보이지만 어깨가 당당하고 전체적으로 듬직한 체구라 할 수 있다. 법의(法衣)는 우견편단(友肩偏袒)으로 가슴 앞에는 왼쪽 어깨에서 대각선으로 내려진 옷 주름선이 굵게 나타나 있고 허리에도 유려하게 흘러내린 옷자락의 선이 희미하게 보인다. 수인(手印)은 양 손을 가슴 앞에서 합장(合掌)한 것처럼 보이나 마멸이 심하여 확인이 어렵다. 무릎 이하의 부분은 현재 매몰되어 있어 세부 양식을 살펴볼 수 없다. 원만한 형태의 안면부와 입가의 미소, 그리고 보주형의 두광과 당당한 체구에서 신라불상의 양식이 강하게 느껴지며, 조성 시기는 대략 동측면의 삼존불과 같은 시기인 통일신라 말의 9세기 말 내지 10세기 초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실측치는 전체 높이 253cmㆍ두광 지름 86cmㆍ머리 높이 42cmㆍ머리 너비 37cmㆍ육계 높이 12cmㆍ육계 너비 16cmㆍ코 길이 19cmㆍ귀 길이 24cmㆍ어깨 높이 169cmㆍ어깨 너비 70cmㆍ부조 높이 3.5cm이다. ㉢ 마애반가사유상(磨崖半跏思惟像) : 삼존불이 조각된 바위의 남측 앞에 있는 정면 삼각형의 암반 북측 면에 선각된 불상이다. 암벽 면은 편편한 편으로 불상을 조각하기에 적당한 크기이나 북향으로 되어 있어 항상 그늘이 지는 곳이다. 암벽 면을 전혀 다듬지 않고 선각(線刻)으로만 반가형의 불상을 조각하였는데 본래부터 얕게 음각한데다 마멸이 심하여 현재 불신(佛身) 상체의 윤곽선과 대좌 하단부의 연판(蓮瓣)이 겨우 확인될 뿐이다. 불상은 대좌에 걸터앉은 자세로 상체를 오른쪽으로 약간 굽히고 오른 팔꿈치를 무릎에 올려놓은 후 손등은 얼굴로 향하고 있어 반가사유상의 모습을 나타내준다. 안면부와 불신부의 세부 모습은 전혀 알아 볼 수 없으나 몸을 오른쪽으로 약간 돌린 자세이다. 하체는 오른쪽 무릎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어서 양 발의 형태는 알 수 없고 대좌 역시 하단에 선각으로 나타낸 5엽의 연판이 겨우 보인다. 이 마애반가사유상은 미완성의 작으로 보이기도 하여 조성 연대를 밝히기는 현재 상태로 어려우나 옆에 있는 삼존불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볼 때 삼존불보다는 약간 늦은 시기에 조각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실측치는 전체 높이 211cmㆍ불신 높이(무릎 이상) 114cmㆍ불신 너비 75cmㆍ머리 높이 37cmㆍ머리 너비 32cmㆍ연판 길이 20cmㆍ연판 너비 15cm이다. ㉣ 남하리사지마애불상군의 가치 : 남하리사지마애불상군은 충북 지방에서는 그리 많지 않은 삼존불과 반가상의 형식을 비롯하여 여래입상을 한 곳에 집중한 마애불상군으로 주목된다. 충북의 삼존불로는 이 사지에서 가까운 청원군 내수읍 비중리에 일광삼존석불(一光三尊石佛)이 있고 괴산군 청천면 낙영산(落影山) 정상부에 마애삼존불입상이 있다. 특히 비중리의 일광삼존석불은 6세기 후반에 조성된 삼국시대 불상으로서 이 지역에 들어온 불상 조각의 초기 양식을 보여 주어 남하리사지의 마애삼존불 조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중앙 본존불이 취하고 있는 통인(通印)의 수인(手印)은 비중리 일광삼존석불의 본존상이나 비중리 석조여래입상의 수인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마애반가사유상은 증원군 가금면 봉황리 마애불상군 중의 반가상과 서로 통하는 자세로 보이나 파손이 심한 관계로 정확한 조각 수법을 알 수 없다. 삼존불과 여래입상, 반가상 등 이곳에 있는 5구의 마애불상은 모두 원만하고 자비스러운 모습의 상호와 당당한 체구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목에는 삼도(三道)가 역시 모두 생략되어 이 불상들이 거의 동시대 작품으로서 지역적 특성을 나타내 준다. 이러한 모습들은 인근의 남하2리[미륵당]에 있는 석조여래입상이나 미암리의 석불 또는 도안면 광덕리의 광덕사(光德寺) 석조여래입상에서 비슷하게 보이고 있다. 이 남하리사지의 앞을 지나는 증평-미원 간 지방도는 지금도 통행량이 많은 편이다. 역사지리적인 면에서도 경북의 상주에서 화령을 넘어 보은-창리-미원-구라산성-초정-증평-진천-죽산-안성-이천-한양으로 통하는 지름길로, 청주의 동부 지역을 비껴가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이러한 지리적 중요성은 이 교통로를 따라 구축된 많은 성곽들을 통하여 입증되며 불교 유적 또한 적지 않게 발견된다. 남하리사지의 마애불상군에서 신라시대 불교미술 전성기의 작풍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지리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통일신라 말기에 조성된 마애불로서 조각 기법의 지역적 특성도 많이 엿보이는 것은 신라 하대의 지방호족 세력의 발흥과 지역문화 역량의 발전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ㆍ남하리석조미륵보살입상(南下里石造彌勒菩薩立像) : 남하리석조미륵보살입상은 증평 시가지에서 청원군 내수읍 초정리 방면으로 가다보면 남하2리 ‘미륵당’ 133-5번지의 논과 밭 사이 공터에 있다. 불상 3구가 마을을 바라보며 북쪽을 향하여 나란히 세워져 있다. 동쪽의 가장 큰 불상은 2001년 7월 13일에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08호로 지정되었다.. 이 불상은 현재 아랫부분이 땅 밑에 묻혀 있어 정확한 크기를 알 수 없으나 지면 위에 노출되어 있는 부분만 하더라도 350cm에 이른다.. 불상의 주변에서 약간의 기와편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대략 고려시대의 절터로 추정되는데, 이 절터에 대한 문헌기록은 없다. 불상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오랜 세월을 노천에서 풍우에 시달려 전체적으로 약간의 마모가 있다. 석질이 약화되기는 하였으나 각부의 조각 양식은 거의 원형대로 잘 남아 있는 편이다. 머리에는 관대가 있는 비교적 높은 보관(寶冠)을 썼는데, 두 귀 위에 장방형의 홈이 있어 보관에 장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크고 원만한 상호에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으며, 이마의 눈썹 사이로 백호(白毫)가 양각되어 있다. 두 귀는 길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었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배 위에 붙여 외장(外掌)하고, 왼손은 가슴 앞으로 올려 연꽃을 잡고 있다. 옷 무늬의 조각 양식이나 수법 및 규모의 장대함 등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 초기[10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왼쪽에 있는 2구의 작은 불상들은 현 위치가 본래의 자리가 아니라 마을 안쪽에서 옮겨 왔다고 전해진다, 마모가 매우 심하여 불상의 형태도 불분명하고. 근래 시멘트로 보수하여 얼굴 등 원형을 크게 상실하였다. 마을 사람들의 구전에 의하면, 예전 이곳에서 가까운 절에 보살이 있었는데 자신의 절이 미륵불 때문에 번창하지 못한다고 오해하고 이 불상들을 넘어뜨려 오랫동안 쓰러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1949년에 속리산 법주사의 윤월인(尹月印) 스님이 이 마을 뒤편 골짜기에 성주사(聖住寺)라는 절을 짓고 마을 주민들의 협조로 쓰러진 불상을 일으켜 세웠으나 보관(寶冠)은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작은 불상들은 ??허리잘린미륵??으로 불리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옛날 이곳에 큰 부자자가 살았다. 그런데 그가 축적한 부는 악독한 방법을 동원해서 얻은 것이었다. 게다가 부를 축적하면 할수록 더욱 인색해졌고, 욕심 또한 날이 갈수록 심했다. 그런데 그 집의 하인 역시 주인을 닮아 인색할 뿐 더러 심술궂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노승이 부자에게 시주를 요청했다. 어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부자는 아는 체하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 울리는 목탁 소리가 시끄러워 하인을 시켜 노승을 쫓아 버리도록 했다. 이에 하인은 빗자루를 들고서 ??우리 주인 나리께서 시끄럽다고 하신다. 딴 데로 가라!??하며 스님을 내목았다. 그러자 노승도 ??소승은 시주을 받을 때까지 가지 못하겠습니다.??하며 완고하게 맞섰다. 이에 주인이 ??거름이나 한 삽 떠 주어라??라고 말하자, 하인은 시키는 대로 거름을 바랑에 퍼 주었다. 노승은 아무 말 없이 거름을 받고는, ??시주를 했더라면 더 큰 부자가 될 방법을 가르쳐주려 했건만......??하며 아쉬운 낯빛을 띠었다. 하인이 노승의 말에 솔깃해 더 큰 부자가 되는 방법을 물어 보았다. 노승은 ??저기 미륵이 부잣집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이 정도의 부밖에 축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저 미륵의 허리를 자르면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며 넌지시 비법을 전해 주었다. 하인은 이 사실을 주인에게 알렸다. 주인은 곧바로 미륵의 허리를 잘라버렸다. 그런데 미륵의 허리를 자르자 하늘에서 느닷없이 벼락이 내리쳤다. 또한 미륵의 허리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 나왔다. 미륵의 피가 흘러내려 내〔川〕가 생길 정도였다. 부자는 이후에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이 그만 망하고 말았다(충청북도ㆍ증평군ㆍ(사)충북향토문화연구소,2008:229~230) ㆍ주명흠묘소(周命欽墓所) : 남하3리 ‘웃말’ 능선에 조성된 초계주씨(草溪周氏) 묘역 안에 있다. 주명흠(1600∼1693)은 조선시대 공주판관을 지냈다. 묘에는 묘비와 문인석 1조, 상석 등이 있고 그 후손들의 묘소가 있다. 묘역 입구에는 가로 97cmㆍ높이 50cmㆍ두께 60cm의 하마석이 있다. 1702년에 세운 하마석은 2007년 10월 15일에 증평군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다. ㆍ안동김씨사(安東金氏祠) : 남하1리 ‘양지말’ 807번지에 있는 안동김씨 재실(齋室)이다. 순조 5년(1805)에 김성무(金聲武)ㆍ김굉(金宏)ㆍ김희석(金羲錫)ㆍ김여귀(金汝龜)ㆍ김의로(金義路) 등 다섯 명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건립하였다. 이후 위로부터 4위(位)는 제사를 지내지 않고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낸 김의로 위패만 모시고 있다. 규모는 정면 4칸ㆍ측면 2칸이다. 비지정문화재이다. ㆍ김환극부부효비각(金煥極夫婦孝碑閣) : 남하1리 ‘솔모루’에 있는 효비각이다. 효비각은 1972년에 김환극[안동김씨]과 그의 처 광산김씨(光山金氏)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김환극은 안렴사 김사렴(金士廉)의 14대손으로 증평읍 남하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의 마을을 항상 기쁘게 해 드렸다. 겨울에는 저녁에 이부자리를 펴놓고 들어가 따뜻하게 하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부모님의 의복을 입어 체온으로 따뜻하게 하는 일을 하루도 빼놓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눕게 되자 변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아 병환 증세를 파악하여 백방으로 다니며 약을 구했다. 추운 겨울날에 물고기 먹고 싶다고 하므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에 하루도 빠짐없이 얼음물로 목욕하고 하늘에 기도를 드린 결과 얼음 속에서 물고기를 잡아 봉양하는 등 효성을 다했다. 그러나 급기야 상을 당하니 애통해 하였다. 3년간 시묘하였는데 죽은 후에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를 증직 받았다. 효비각의 구조는 정면 1칸ㆍ측면 1칸 맞배지붕구조의 목조기와집이며, 효비각 안에 있는 효비의 비문은 1958년에 성균관장 최찬익(崔燦翊)이 짓고 글씨는 괴산군수 이길원(李吉遠)이 썼다. 비지정문화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