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의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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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면

성도리와 귀봉정마을로 구성된

화성리(花城里)

[ 연혁 ]

화성리는 본래 조선시대 청안현(淸安縣) 북면(北面) 지역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 기록에는 청안현 북면에 33개리가 있었다. 그 중에서 현재의 화성리와 관련된 마을로는 명암상리(鳴巖上里),명암하리(鳴巖下里),행정리(杏亭里),상작달리(上爵達里),상작달하리((上爵達下里),칠곡리(七谷里),구화리(九化里)등 7개리가 있었다. 그 뒤 화성리는 건양(建陽) 원년(1895)에 청안현(淸安縣)이 청안군(淸安郡)으로 승격되면서 청안군의 6개 면인 읍내면(邑內面),동면(東面),남면(南面),북면(北面),근서면(近西面) 중에서 북면(北面)에 속하는 지역이 되었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名稱一覽)』(1912)에서도 당시 청안군 북면은 33개리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 사이 명암상리(鳴巖上里)와 명암하리(鳴巖下里)가 합쳐져서 명암리(鳴岩里)로 불리게 됐고, 행정리(杏亭里)는 행화정리(杏花亭里)로, 상작달리(上作達里)는 상작리(上嚼里)로, 상작달하리(上爵達下里)는 하작리(下嚼里)로, 구화리(九化里)는 구화리(九花里)로 바뀌었고, 비석리(碑石里)가 새로 생겼다. 1914년에 일본제국주의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도안면(道安面)은 7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따르면, 화성리는 북면 성도리(城都里),구화리(九花里),상작리(上作里),하작리(下作里),행화정리(杏花亭里),칠곡리(七谷里),명암리(鳴巖里),비석리(碑石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만들었다. 이때 구화리와 성도리의 이름을 따서 화성리라 하고, 괴산군 도안면에 편입하였다. 광복 이후 1948년 8월 15일에 정부가 수립되고, 동년 11월 17일에 법률 제8호 「지방 행정에 관한 임시 조치법」이 제정ㆍ공포됨에 따라 괴산군 도안면 화성리가 되었다. 1990년 12월 31일에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괴산군 도안면에서 충청북도증평출장소(忠淸北道曾坪出張所)로 바뀔 때, 화성리는 도안지소(道安支所) 관할이었다.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도안면 화성리가 되었다.

[ 유래 ]

화성리는 1914년에 구화리(九花里)와 성도리(城都里)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화성리는 도안면의 중심 마을로, 면사무소,우체국,초등학교,농협지소,도안역,경찰서 치안센터 등 면단위관공서가 있다. 증평과는 증평군청으로부터 36번국도의 충주 방향 5km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2010년 5월 현재 362세대에 911명이 거주하고 있다.

  • 화성1리(花城一里) : ,성도리(城都里) : 화성1리는 ‘성도리’,‘귀봉정’,‘비석촌(碑石村, 비선거리)’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비석촌’은 경지정리로 인하여 사라진 지 오래다. 지금은 ‘성도리’와 ‘귀봉정’이 화성1리를 구성하고 있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名稱一覽)』(1912)과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성도리(城都里)’로 기록되어 있다. 성도리는 화성리의 북쪽 끝으로, 송정리(松亭里)ㆍ광덕리(廣德里)와 이웃하고 있다. ‘성도리’라는 이름은 이 마을이 이성산의 옛 토성 터 안에 자리한 고장이라서 붙은 것으로 추정된다. ‘성도리’라는 지명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이곳은 처음에는 마한의 옛 땅이었으나, 후에 고구려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으로 신라,백제와 각축전을 벌였던 중요한 방어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이곳에 병영을 세워 낮에는 청장년에게 군사훈련을 시키고 무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성도리는 왼쪽 산줄기가 ‘매봉’에서 북쪽으로 ‘비석촌’을 향하여 뻗었고, 또 한 줄기는 도안초등학교로 뻗어와 마을을 껴안고 있어 마을은 동향으로 자리를 잡았다. 마을 앞으로는 음성군 백마령(白馬嶺)에서 발원하여 내려오는 문암천(文岩川)이 흐르고, 이 내를 건너 나지막한 백곡현은 안산(案山)이 되어 북에서 남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멀리 보강산이 조배산(朝拜山)이 되어 삶의 터전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북서쪽의 두타산 영맥은 거센 추운 바람을 막아 주어 수리와 장풍이 알맞아 의식이 풍족하고 인물이 많을 길지로 여겨졌다. 풍수지리로 말하면 복해형(伏蟹形)으로, 게가 ‘성도리’를 감싸 안으면서 앞의 냇물을 향해 있다. 수구(水口)는 북동쪽에서 남쪽을 향해 흐르고 있는데, 넓은 들을 적셔주는 크나큰 보(洑)가 있다. 성도리가 형성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 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에 제일 먼저 터를 잡은 사람들은 곡산연씨(谷山延氏) 눌문파(訥文派)의 연예수(延禮秀)가 이곳에 정착하면서이다. 가까운 ‘명암’에서 분가하여 농사를 짓기에 편리한 이곳으로 이거하여 터전을 마련하면서이다. 이후 전주이씨,경주이씨,강릉김씨,안동김씨 등이 이곳으로 옮겨와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특히 이 마을에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에 보통학교가 이곳에 개교하면서부터이다. 도안초등학교(道安初等學校)가 1925년에 ‘도안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면서 초등교육은 이곳에서 전담하게 되었고, 도안면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성도리는 동제를 통하여 마을의 안녕과 화합을 다져왔다. 마을에서는 전통적으로 음력 정월 보름에 마을 주민 모두가 참여한 가운데 마을회관에서 간단하게 음식을 차려놓고 동제(洞祭)를 행하고 있다. 이 마을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농악대가 조직되어 마을의 큰일에는 흥겨움을 더해 주고 주민들의 단합에 한몫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농악놀이가 행해지지 않고 있다. 성도리에는 청안동헌(淸安東軒)인 ‘안민헌(安民軒)’과 관련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성도리에 도안현이 있을 때의 일인데, 현감 부인의 미모가 매우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부부 사이의 금슬도 매우 좋아 주위의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그러나 슬하에 자식이 없어 고민하다가 현감 부인이 이성산에 있는 한 절에 가서 부처님께 불공을 드려 아들을 얻으려다 스님과 눈이 맞아 방종하였다. 이것을 눈치 챈 현감은 부인을 사형시키고, 충청도관찰사에게 상소하여 도안현을 폐쇄하고 청안으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도안면지편찬위원회, 2001: 220~221). ,귀봉정(歸鳳亭)/구궁정(舊弓亭) : ‘성도리’의 북쪽 산기슭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九花/구봉졍이’로 기록되어 있다. ‘귀봉정’은 세종대왕 6세손이며 호조참판을 지낸 이중재가 ‘귀봉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살았기에 붙은 이름이라 전한다. 달리 ‘구궁정’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예전 활터’로 풀이된다. ‘구궁정’은 궁터가 있었고 활촉과 무기를 만들던 대장간이 있어 붙은 이름이라 전한다. 관련 기록이나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활터’라는 지명이 남아 있음을 볼 때는 이런 추정이 가능하다. 구궁정골 : ‘구궁정’ 남쪽에 붙어 있는 골짜기이다. ‘구궁정골’은 ‘구궁정’과 ‘골’로 나뉘며, ‘구궁정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구궁정앞들 : ‘구궁정’ 앞쪽[북쪽]에 붙어 있는 들이다. ‘구궁정앞들’은 ‘구궁정’과 ‘앞들’로, ‘앞들’은 다시 ‘앞’과 ‘들’로 나뉜다. 따라서 ‘구궁정앞들’은 ‘구궁정 앞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도안수리조합저수지(道安水利組合貯水池)/연암저수지(硯岩貯水池) : ‘성도리’ 서쪽에 있는 저수지로, 1956년에 축조되었다. 본래 명칭 ‘도안수리조합저수지’ 대신 ‘연암저수지’로 더 알려져 있다. 노암,괴정에서 북쪽으로 ‘베루재고개’ 밑에 있는 저수지까지 연결된다. 모정골(茅亭-) : ‘귀봉정’ 앞 충북선 철도와 ‘행갈’,‘뱀티’에서 내려오는 제방 길과 만나는 부근에 있는 골짜기이다. ‘모정골’은 ‘모정’과 ‘골’로 나뉘며, ‘모정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모정’은 ‘짚이나 새 따위로 이은 정자’를 말한다. 이중재가 ‘귀봉정’에 살고 있어, 청안현감이 신변을 보호하는 예우로 모정을 지어 지키게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비석촌(碑石村)/비석거리(碑石-)/비선거리[碑石-]/비성거리[碑石-] : ‘귀봉정’ 북쪽에 있던 마을이다. 지금은 마을이 없어지고 농경지로 변했다. 옛날 이곳에는 비문(碑文)이 없는 비석이 한 개 있었으나, 1941년에 수해로 매몰됐다고 한다. 이 비석으로 인하여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없어진 비석은 ‘귀봉정’에 사는 이 참판 댁을 방문할 때의 하마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한국행정구역명칭일람』(1912년)에 ‘비석촌(碑石村)’이 보이고,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碑石/비션거리’로 기록되어 있다. ‘비석촌’은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는 과정에서 ‘성도리’에 속하게 되었다. ‘비선거리’나 ‘비성거리’는 모두 ‘비석거리’의 변화형이다. 비성거리들[碑石-] : ‘비석촌’ 서북쪽에 있는 넓은 들이다. ‘비성거리들’은 ‘비성거리’와 ‘들’로 나뉘며, ‘비석거리에 있는 둘’로 풀이된다. 소탁골 : ‘귀봉정’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소탁골’은 ‘소터골’의 변화형이다. ‘소터골’은 ‘소터’와 ‘골’로 나뉜다. ‘소터’는 ‘솔터’에서 치조음 ‘ㄹ’이 탈락한 어형이다. 여기서 ‘솔’은 두 가지로 풀이된다. 하나는 ‘솔다[좁다]’의 어간 ‘솔’이니, 그렇다면 ‘솔터골’이나 변화형 ‘소탁골’은 ‘좁은 터에 있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소나무’의 뜻이니, 그렇다면 ‘솔터골’이나 변화형 ‘소탁골’은 ‘소나무 터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연탄1리 ‘텃골’을 참고하기 바란다. 원모링이(院-) : ‘비석촌’ 위쪽 산모퉁이로, ‘둥구머리’ 앞에 있다. ‘원모링이’는 ‘원모롱이’의 변화형이다. ‘원모롱이’는 ‘원모롱’에 접미사 ‘이’가 붙은 어형으로, ‘원이 있는 모퉁이’로 풀이된다. ‘원’은 ‘고려,조선시대에 역과 역 사이에 두어, 공무를 보는 벼슬아치가 묵던 공공여관’을 말한다. 정문거리(旌門-) : 도안초등학교 앞의 거리이다. ‘정문거리’는 ‘정문’과 ‘거리’로 나뉘며, ‘정문이 있는 거리’로 풀이된다. ‘연종록부부정효각’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탑골(塔-) : 도안초등학교 뒤 골짜기이다. ‘탑골’은 ‘탑’과 ‘골’로 나뉘며, ‘탑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옛날에 탑이 있었다고 하여 붙은 지명이나, 현재 탑은 없다. 활터 : ‘성도리’ 뒷산 능선에서 ‘귀봉정’ 산 쪽을 향해 있는 터이다. 옛날에 활을 쏘는 무력 단련장이 있었다고 전한다.
  • 화성2리(花城二里) :,행정(杏亭)/행화정(杏花亭)/역전(驛前) : 도안역 앞에 있는 마을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에는 ‘행정리(杏亭里)’로,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名稱一覽)』(1912)에는 ‘행화정(杏花亭)’으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杏花亭/우레바위’로 기록되어 있다. ‘행정’은 살구나무 정자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달리 ‘행화정’으로도 불리는데, ‘행정’과 그 뜻이 같다. 고유지명 ‘우레바위’는 ‘명암(鳴岩)’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이 마을은 1928년에 건립된 도안역(道安驛)이 있어, 달리 ‘역전(驛前)’으로도 불린다. 현재는 본래 지명인 ‘행정’이나 ‘행화정’보다 ‘역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행정’은 북쪽으로는 ‘성도리(城都里)’가, 남쪽으로는 ‘상작(上作)이 자리 잡고 있다. ‘행정’ 역시 이웃하고 있는 ‘성도리’와 마찬가지로 ‘매봉산’ 지류가 뻗어 내린 동쪽 완사면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마을 형세는 국도를 따라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이곳에는 도안역 외에 1920년경 이 마을에 자리 잡은 도안파출소(道安派出所), 1923년에 ‘가무지’에서 옮겨온 도안면사무소(道安面事務所), 그리고 도안우체국(道安郵遞局) 등 관공서가 밀집해 있다. 이 마을에는 오늘까지도 마을 주민들이 모두 모이는 동계가 있어 매년 음력 10월 그믐날에 모임을 갖고 있다. 일 년에 한 번씩 이 모임을 통하여 주민들의 단합을 다져오고 있다. ‘ 도안역(道安驛) : ‘역전’에 있는 충북선의 기차역으로, 충북선이 개통된 이듬해[1928년]에 설립되었다. 벼락골 : 도안면사무소 뒤로 해서 ‘행갈’로 가는 왼쪽에 있는 골짜기다. 지명에서 ‘벼랑’은 매우 다양하게 실현된다. ㉠ ‘바람’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바람고지’,‘바람골’,‘바람들’,‘바람말’,‘바람모팅이’,‘바람바우’,‘바람실’,‘바람재’ 등이 그 예이다. ㉡ ‘바랑’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바랑골’,‘바랑끝’,‘바랑날’,‘바랑들’,‘바랑말’,‘바랑메’,‘바랑바구’,‘바랑배미’ 등이 그 예이다. ㉢ ‘벼루’로 나타나기도 하니, ‘벼루고개’,‘벼루들’,‘벼루말’,‘벼루모탱이’,‘벼루배미’,‘벼루재’ 등이 그 예이다. ㉣ ‘벼락’이나 ‘베락’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벼락산’,‘벼락고개’,‘벼락골’,‘벼락바위’,‘벼락배미’,‘베락골’,‘베락매’,‘베락바우’ 등이 그 예이다. ㉤ ‘비럭’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비럭골’,‘비럭굴’,‘비럭동’,‘비럭뜸’,‘비럭바구’,‘비럭보’,‘비럭재’ 등이 그 예이다. ㉥ 이밖에도 ‘베루’,‘베리’,‘비링이’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베루골’,‘배루들’,‘베루메’,‘베루모퉁이’, ‘베리끝’,‘베리미’,‘베리바우’,‘베리산’,‘베리재’,‘비링이들’ 등이 그 예이다. 따라서 ‘벼락골’은 ‘벼랑으로 되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살구정들(-亭-) : ‘행정’ 동쪽, 문암천 서쪽에 붙어 있는 들이다. ‘살구정들’은 ‘살구정’과 ‘들’로 나뉜다. ‘살구정’은 ‘행정’과 같은 뜻이니, 이 들이 ‘행정’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살구정보(-亭洑) : ‘역전’ 앞에 있는 보이다. ‘살구정보’는 ‘살구정’과 ‘보’로 나뉘며, ‘살구정들에 물을 대는 보’로 풀이된다. 쌍둠벙(雙-) : ‘역전’ 동쪽으로 하천 건너 ‘쌍버드나무거리’ 옆에 있던 웅덩이이다. 이곳에는 둑을 사이에 두고 백 평 정도의 웅덩이가 2개 있었는데, 하나는 물이 맑았으나 하나는 물이 흐렸다. 마을 사람들은 ‘쌍둠벙’을 ‘암놈물’과 ‘수놈물’로 불렀다. 그런데 1946년에 큰 장마로 인해 그곳에 하나의 웅덩이가 더 생겨 3개가 되었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물놀이를 즐겼으나, 지금은 경지정리로 없어졌다. 역전보(驛前洑) : ‘역전’ 동쪽 하천에 있는 보이다. ‘역전보’는 ‘역전’과 ‘보’로 나뉘며, ‘역전마을에 있는 보’로 풀이된다. 해남들 : ‘역전’ 앞에 있는 들이다. 36번국도와 충북선 건너편에 연암천을 주변으로 하는 경작지를 말한다. ‘해남들’은 ‘해남’과 ‘들’로 나뉜다. 여기서 ‘해남’의 뜻은 분명하지 않다. 지명에 따라서는 ‘해남’이 ‘홰나무’와 관련된다. 그렇다면 ‘해남’은 ‘홰나무’의 변화형이고, ‘해남들’은 ‘홰나무가 있는 들’로 풀이된다. 행정고개(杏亭-) : ‘행정’ 서쪽에 있는 고개로, 노암1리 ‘행갈’로 갈 때 이용된다. ‘행정고개’는 ‘행정’과 ‘고개’로 나뉘며, ‘행정마을에 있는 고개’로 풀이된다. 현재는 2차선포장도로가 되었다. 행정골(杏亭-) : ‘행정’ 북서쪽에, 마을과 붙어있는 골짜기이다. ‘행정골’은 ‘행정’과 ‘골’로 나뉘며, ‘행정마을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 화성3리(花城三里) : ,상작(上爵)/위작다리 : ‘상작’은 도안면사무소에서 남쪽으로 900m의 거리에 있다. ‘상작’은 화성4리 ‘하작’과 함께 ‘작다리’로 불리는데, ‘새말장둑’이 경계이다. 즉 ‘새말장둑’ 북쪽은 ‘상작’이고, 남쪽은 ‘하작’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에도 ‘상작달리(上爵達里)’와 ‘상작달하리(上爵達下里)’가 보인다. 그러나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名稱一覽)』(1912)에는 ‘상작(上作)’과 ‘하작(下作)’으로 바뀌어 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上作/윗작다리’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상작’이란 지명은 일제시대에 들어서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이후 계속해서 오늘날까지 ‘상작’이라는 지명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위작다리’는 ‘작다리’ 중 위쪽[북쪽]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작다리’는 ‘작달이’에서 변한 이름이라 전한다. ‘작달이’는 ‘벼슬 작(爵)’, ‘다다를 달(達)’을 합성한 지명으로, 세 명의 진사를 배출한 데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그 중 한 사람이 곡산연씨(谷山延氏) 가문의 연주운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졌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문과에 응시해 급제하고 벼슬길로 나아가는 것이 정도(正道)였다. 또한 진사는 문과를 단념하더라도 지방의 지도자로 군림하였으니, 일반 백성들에게 숭배와 존중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한 마을에서 진사를 무려 세 명씩이나 배출했다는 사실이 마을 사람들에게 큰 자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이곳을 ‘작달이’라고 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상작’은 마을 뒤쪽으로는 ‘매봉산’이, 우측으로는 ‘새말장둑’이, 좌측으로는 ‘작은재뿌리’가 감싸고 있어 아늑한 느낌을 준다. 앞으로는 화성천이 흐르고, 이 물을 이용하는 옥토가 펼쳐져 있다. 거기다가 충북선 철로와 36번국도가 함께 지나고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상작’의 농악은 옛날부터 유명하였다. 일제시대에 충북농악경연대회에서 1등을 하여 상으로 받은 파란 무늬로 제작된 농악기(農樂旗)가 40여 년 전까지 보관되어 있었다. 징,꽹과리,북,장고,소고,들메갓 등을 보관하고 고인이 된 김윤원과 송종의가 상쇠가 되어 농악을 울리며 농사철에 흥을 돋았다. 농악은 주로 명절 때,매봉산 달마중 때,샘굿 때,가정방문으로 모곡(募穀)할 때 등 여러 경우에 즐겼다. 그러나 지금은 풍물소리가 사라졌다. 금박골 : ‘상작’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금박골’은 ‘금박’과 ‘골’로, ‘금박’은 다시 ‘금’과 ‘박’으로 나뉜다. ‘금’은 ‘?’과 관련하여 그 어원을 풀 수 있다. 현대 지명에 나타나는 ‘?’ 계 지명은, 가장 흔한 모습이 ‘?>감’에 조음소 ‘아’가 개재된 ‘가마’인데, 때로는 ‘감’,‘검’,‘금’,‘가마’,‘가매’,‘고마’,‘가미’,‘가무’,‘개마’,‘개매’ 등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들은 ‘신(神)’이나, 여기서 발전한 ‘크다[大]’를 뜻하게 된다. ‘박’은 ‘바위’의 방언형이나 ‘밭’으로 볼 수 있다. ‘밭’이 ‘골’ 앞에서 ‘박’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의 설명에 따르면, ‘금박골’은 ‘큰 바위가 있는 골짜기’나 ‘큰 밭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할 수 있다. ‘?’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연탄1리 ‘궁골’을 참고하기 바란다. 매봉산(-峰山) : ‘상작’ 뒤[서쪽]에 있는 산이다. ‘매봉산’은 ‘매봉’과 ‘산’으로 나뉜다. 전국에는 ‘매봉’ 또는 ‘매봉산’이 매우 많다. 대부분 ‘매[鷹]’로 보아, ‘매처럼 생긴 산’,‘매가 앉아 있는 모양을 닮은 산’,‘매를 놓아 사냥하던 산’으로 해석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매[梅]’로 보아, ‘매화나무가 있는 산’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매’는 ‘산(山)’을 뜻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주변에 있는 산이기 때문에 ‘산’의 뜻으로 ‘매’라 했다가, ‘산봉우리’라는 뜻을 분명히 나타내기 위해 ‘봉(峰)’을 붙여 ‘매봉’이라 한 것이다. 그리고 ‘산’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산(山)’을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매봉산’은 ‘산’을 뜻하는 세 개의 어형이 결합된 지명이 된다. ‘산’을 뜻하는 ‘매’,‘봉’,‘산’ 중 ‘매→봉→산’의 순으로 수효가 많다. 또 ‘매’ 뒤에 ‘봉’,‘산’이 붙거나 ‘봉’ 뒤에 ‘산’이 붙는 예도 허다하나, 거꾸로 ‘봉’,‘산’ 뒤에 ‘매’가 붙거나 ‘산’ 뒤에 ‘봉’이 붙는 예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이처럼 수효 면이나 유의중복 면에서 볼 때, 산명의 후부요소는 ‘매→봉→산’의 순으로 ‘산’이라는 본래의 뜻을 보다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미’,‘뫼’,‘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송산2리 ‘안자산2’를 참고하기 바란다. 상작들(上爵-) : ‘상작’ 앞에 있는 들이다. 보강천과 문암천이 만나는 곳에 있다. 지금은 충북선 철도와 36번국도가 고가로 지나고 있다. ‘상작들’은 ‘상작’과 ‘들’로 나뉘며, ‘상작마을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새말장둑(-長-) : ‘상작’과 ‘하작’의 경계를 이루는 산모퉁이이다. 화성삼거리의 북쪽 편에 있다. ‘새말장둑’은 ‘새말’과 ‘장둑’으로 나뉜다. ‘장둑’은 ‘긴 둑’이니, ‘새말장둑’은 ‘새로 생긴 마을의 긴 둑’으로 풀이된다. ‘새말장둑’은 충주 간 4차선포장도로가 개설되는 관계로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새봇들(-洑-) : ‘주랏들’ 위에 있는 들이다. ‘새봇들’은 ‘새보’와 ‘들’이 사이시옷을 매개로 연결된 어형이다. ‘새보’는 ‘새로 만든 보’를 뜻하니, ‘새봇들’은 ‘새보의 물로 농사짓는 들’로 풀이된다. 이 들은 괴산군 사리면에서 내려오는 보강천에 새로 보를 막아 농사를 짓고 있다. 서당골(書堂-) : ‘상작’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에는 옛날 서당이 있어 아동들에게 글을 가르쳤던 곳이라고 전한다. 이곳에는 언제나 샘솟는 샘물이 있다. 옛날 이곳에 큰 부자가 살았다. 그런데 부자의 몸에 부스럼이 생겼고, 백약이 무효했다. 그러던 중 서당골의 샘물에서 우연히 목욕을 한 후에 부스럼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후로 “서당골의 샘물은 약 샘물이다.”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인근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또한 “서당골에서 목욕을 하면 앉은뱅이도 일어선다.”는 말까지 생겨 오늘날까지 구전되고 있다. 일설에는 선녀들이 자주 내려와 목욕을 하고 갔다고 한다. 지금은 빨래터로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선바위 : ‘서당골’의 산기슭에 서 있는 높이 5m,둘레 5m 정도의 바위이다. ‘선바위’에는 전설이 전한다. 옛날 이곳 마을에는 힘이 센 장수가 살고 있었다. 어찌나 힘이 센지 웬만한 바위를 공깃돌처럼 들었다 놨다 했다. 사람들은 장수가 훗날 나라에 크게 쓰일 재목이 될 것이라고 여겼다. 실제로 나라에 난리가 일어나자 왕은 장수를 급히 불러들였다. 출전에 앞서 장수는 동네 사람들을 ‘서당골’ 산등성에 있는 큰 굴에 피난시키고, 그 입구를 선돌로 막았다. 혹 있을지 모를 외적의 횡포를 미연에 방지하자는 심산이었다. 장수는 동네 사람들에게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왕명을 받들었다. 그러나 장수는 전장에서 날아드는 화살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장수가 와서 선돌을 치워주기만 학수고대하던 동네 사람들은 얼마간의 식량으로 전전하다가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지금은 굴이 막혀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장수가 세워놓았다고 하는 선바위는 아직도 꿋꿋하게 서서 예전의 안타까움을 말해주는 듯하다 쌍버드나무거리 : 도안역에서 석곡리 ‘양지말’로 가는 하천 둑을 가리킨다. 100여 년이 넘은 큰 버드나무가 두 그루가 서 있어 붙은 이름이다. 그 나무 그늘에서 농사철에 점심과 새참을 먹기도 하고 낮잠을 즐기던 곳인데, 30여 년 전에 벼락을 맞아 지금은 흔적도 없다. 작은재뿌리 : ‘상작’ 서북쪽에 있는 고개이다. ‘작은재뿌리’는 ‘작은’과 ‘재뿌리’로, ‘재뿌리’는 다시 ‘재’와 ‘뿌리’로 나뉜다. ‘뿌리’는 ‘부리’의 변화형이다. ‘부리’는 백제어 ‘夫里’(*부리)에 소급되는데, 고구려어 ‘忽’(*홀,*골)이나 신라어 ‘火,伐’(*불)과 동계어로 추정된다. ‘부리’는 현대 지명에서 의미변화가 일어나, 대개는 ‘산부리, 즉 산의 어느 부분이 부리같이 쑥 내민 곳’을 뜻하게 되었다. 따라서 ‘작은재뿌리’는 ‘산의 어느 부분이 부리같이 쑥 내민 작은 고개’로 풀이된다. ‘부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송산2리 ‘모종뿌리’를 참고하기 바란다. 작은파랑골 : ‘상작’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하작’ 뒷산으로 오르는 길목이다. 규모가 작다. ‘작은파랑골’은 ‘작은’과 ‘파랑골’로 나뉘고, ‘파랑골’은 ‘바랑골’과 관련된다. 전국에 ‘바랑골’은 매우 많다. 그런데 ‘바랑’은 몇 가지로 다르게 해석된다. 첫째는 ‘바랑’을 ‘중이 등에 지고 다니는 자루 같은 주머니’로 보아, ‘바랑처럼 생긴 골짜기’로 풀이한다. 둘째는 ‘바랑’을 ‘바른’의 변화형으로 보아, ‘지형이 바른 골짜기’로 풀이한다. 셋째는 ‘바랑’을 ‘바람[風]’의 변화형으로 보아, ‘바람이 센 골짜기’로 풀이한다. 넷째는 ‘벼랑’으로 보아, ‘벼랑으로 된 골짜기’로 풀이한다. 이 중 특히 넷째 풀이에 관점을 맞춰 좀더 자세히 설명한다. 지명에서 ‘벼랑’은 매우 다양하게 실현된다. ㉠ ‘바람’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바람고지’,‘바람골’,‘바람들’,‘바람말’,‘바람모팅이’,‘바람바우’,‘바람실’,‘바람재’ 등이 그 예이다. ㉡ ‘바랑’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바랑골’,‘바랑끝’,‘바랑날’,‘바랑들’,‘바랑말’,‘바랑메’,‘바랑바구’,‘바랑배미’ 등이 그 예이다. ㉢ ‘벼루’로 나타나기도 하니, ‘벼루고개’,‘벼루들’,‘벼루말’,‘벼루모탱이’,‘벼루배미’,‘벼루재’ 등이 그 예이다. ㉣ ‘벼락’이나 ‘베락’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벼락산’,‘벼락고개’,‘벼락골’,‘벼락바위’,‘벼락배미’,‘베락골’,‘베락매’,‘베락바우’ 등이 그 예이다. ㉤ ‘비럭’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비럭골’,‘비럭굴’,‘비럭동’,‘비럭뜸’,‘비럭바구’,‘비럭보’,‘비럭재’ 등이 그 예이다. ㉥ 이밖에도 ‘베루’,‘베리’,‘비링이’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베루골’,‘배루들’,‘베루메’,‘베루모퉁이’, ‘베리끝’,‘베리미’,‘베리바우’,‘베리산’,‘베리재’,‘비링이들’ 등이 그 예이다. ‘파랑골’ 즉 ‘바랑골’은 넷째의 해석대로 ‘벼랑으로 되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파랑골’ 중 규모가 작은 곳이 ‘작은파랑골’이고, 이는 ‘큰파랑골’과 대비적으로 쓰이는 이름이다. 쟁골 : ‘서당골’ 남쪽에 붙어 있는 골짜기이다. 전국적으로 ‘쟁골’이란 지명은 매우 흔한데, 대부분 기와를 구었다거나 재궁이 있었다는 유래담이 관련되어 있다. 또한 ‘재경골’이나 ‘재궁골’ 또한 매우 흔한 지명인데, 여기에는 재궁이 있었다는 유래담이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는 ‘쟁골’을 ‘재궁골(齋宮골)’에서 변한 말로 추정한다. ‘재궁골’이 변해 ‘재경골’이 되고, 다시 ‘쟁골’이 된 것이다. ‘재궁(齋宮)’은 ‘재실(齋室)’과 같은 말로, ‘제사를 지내려고 지은 집’을 말한다. 이곳은 ‘서당골’과 붙어 있는 골짜기임을 상기할 때, 예전에 서당과 관련하여 제사를 지내는 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쟁골고개 : ‘쟁골’에 있는 고개이다. ‘쟁골고개’는 ‘쟁골’과 ‘고개’로 나뉘며, ‘쟁골에 있는 고개’로 풀이된다. 옛날 화성리 사람들이 청안장을 보러 다니던 길이다. 1928년 12월 25일에 청안보통역이 증평에 신설되어 증평장이 활성화된 뒤에는 이용되지 않았다. 정문거리(旌門-) : 상작마을회관 옆에 있는 거리이다. ‘정문거리’는 ‘정문’과 ‘거리’로 나뉘며, ‘정문이 있는 거리’로 풀이된다. ‘곡산연문쌍효각’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주랏들 : ‘상작’ 앞 36번국도와 철로를 넘어 보강천과 연암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부근에 있는 들이다. ‘주랏들’은 ‘주라’와 ‘들’이 사이시옷으로 연결된 어형이다. 여기서 ‘주라’의 뜻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전남 보성군 보성면 쾌상리에 ‘주랏태’라는 보(洑)가 있는데, 이 보에는 ‘줄’이 많다 한다. 그렇다면, ‘주라’는 ‘줄’의 변화형으로 추정되고, ‘주랏들’은 ‘줄이 많은 들’로 풀이된다. ‘줄’은 포아풀과에 속하는 다년초로, 키는 1∼2m이다. 한여름에 줄기 끝에 이삭이 나와서 원추화서의 꽃이 피는데, 위쪽에 연노랑빛의 암꽃, 아래쪽에 붉은 자줏빛의 수꽃이 달리며, 영과(穎果)는 가늘고 길다. 주을앞보[-洑] : ‘상작’ 앞에 있는 보이다. ‘주을앞보’는 ‘주을’과 ‘앞보’로, ‘앞보’는 다시 ‘앞’과 ‘보’로 나뉜다. ‘주을제’,‘주을지’ 등이 ‘줄못’과 병용되는 예가 있음을 볼 때, ‘주을’은 ‘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주을앞보’는 ‘줄이 많은, 앞에 있는 보’로 풀이된다. 큰파랑골 : ‘작은파랑골’ 위에 있는 골짜기로, 노암리 ‘행갈’ 쪽에 있다. 규모가 크다. ‘큰파랑골’은 ‘큰’과 ‘파랑골’로 나뉘고, ‘파랑골’은 ‘바랑골’과 관련된다. ‘파랑골’ 즉 ‘바랑골’은 ‘벼랑으로 되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파랑골’ 중 규모가 큰 곳이 ‘큰파랑골’이고, 이는 ‘작은파랑골’과 대비적으로 쓰이는 이름이다. 합수머리(合水-) : ‘상작’ 서쪽에 있는 곳이다. ‘합수머리’는 ‘합수’와 ‘머리’로 나뉘며, ‘물이 합치는 위쪽’으로 풀이된다. 여기는 문암천과 ‘모래재’에서 발원한 지류가 맞닿는 곳이다. 큰 모래사장이 있었다. 또한 물이 맑아 이곳에서 멱을 감고 모래장난을 하였으며, 칠월 백중에는 백중놀이로 백사장에서 전국장사씨름대회가 열려 도안면민은 물론 인근 주민들이 많이 모여들던 곳이다.
  • 화성4리(花城四里) : ,하작(下爵)/아래작다리/주막촌(酒幕村) : 36번국도와 34번국도의 삼거리에 있는 마을이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하작(下作)’으로 불리던 곳이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下作/아?작다리’로 기록되어 있다. ‘하작’은 ‘새말장둑’ 남쪽에 있는 마을로, 산모퉁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명암’의 ‘북촌’과 약간 떨어져 있다. ‘하작’을 달리 ‘아래작다리’로 부른다. ‘작다리’ 중 ‘새말장둑’ 아래쪽[남쪽]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이곳은 괴산,충주,증평으로 이어지는 삼거리로, 교통상의 중요 지역이다. 따라서 과거에는 이곳에 주막이 있어 증평,음성,괴산 장(場)으로 드나들던 장꾼들이 쉬어가던 곳이다. 지금은 주막이 없어졌지만,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붙은 이름이 ‘주막촌’이다. 옻샘골 : ‘하작’에서 이성산을 오르는, 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옻샘골’은 ‘옻샘’과 ‘골’로, ‘옻샘’은 다시 ‘옻’과 ‘샘’으로 나뉜다. ‘옻’은 ‘옻나뭇과 식물 속에 있는 우루시올(urushiol)에 의한 접촉성 피부염’으로, 빨갛게 붓거나 물집이 생기거나 하여 매우 가렵다. 옻이 오르면 찬물로 닦는 것이 효과적이다. 찬물이 피부염을 진정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옻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는 찬물 샘을 ‘옻샘’으로 불렀던 것이다. 과거 물이 차고 좋아 피부병에 특별한 효험이 있었다. 이곳은 찬 샘이 있는 골짜기이다. 칠곡리(七谷里) :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칠곡(七谷)’으로 불리던 곳이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七谷/?말’로 기록되어 있다. ‘?말’이란 기록으로 보아, 조선후기부터 존재하였던 마을로 추정된다.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는 과정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다만 ‘명암’ 북쪽 ‘주실산’의 북서쪽이 ‘칠곡산(七谷山)’으로 불리고 있어, 이 지역에 ‘칠곡리’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화성교(花城橋) : ‘하작’ 앞 화성삼거리에서 괴산으로 가는 길에, 개울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이다. 길이 73m,너비 4m로, 1928년에 준공되었다. 『조선환여승람』 괴산군편에는 ‘화성교(華城橋)’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을 이름 ‘화성리’에 기대어 붙인 이름이다. 화성천(花城川) : ‘상작’ 앞[동쪽]에 있는 내이다. 마을 이름 ‘화성리’에 기대어 붙인 이름이다.
  • 화성5리(花城五里) : ,북촌(北村) : 오늘날 화성5리를 이루는 ‘북촌’, 화성6리를 이루는 ‘남촌’, 그리고 화성7리를 이루는 ‘행화촌’은 본래 ‘명암(鳴岩)’,‘울어바우’,‘우레바우’,‘우레바위’,‘우르배’로 불리던 마을이다. ‘명암(鳴岩)’은 화성리 중 남단 마을이다. 도안면사무소에서 증평 쪽으로 1.8km 거리의 36번국도 가에 있으며, 증평읍 미암리와 경계를 이룬다. 흔히 ‘명암대촌(鳴巖大村)’이라 불릴 만큼 화성리 가운데 가장 큰 마을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에는 ‘명암상리(鳴巖上里)’와 ‘명암하리(鳴巖下里)’로 나뉘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과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鳴岩/우레바위’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에 두 마을이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 1914년에 다시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는 과정에서 ‘명암’은 화성리에 속하게 되었다. 이러한 행정구역은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이어져오고 있다. ‘북촌’은 ‘명암’ 중 북쪽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그리고 ‘남촌’ 및 ‘행화촌’과는 ‘명암’을 흐르는 개울을 따라 구분하였다. 그러나 현재 개울은 복개(覆蓋)되었다. ‘명암’은 이성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줄기가 마을 뒤의 상산봉(上山峰)을 이루고, 이 산 꼭대기에서 오른쪽으로 칠곡산(七谷山)과 주실산(珠實山)이 뻗어있으며, 왼쪽으로는 안산(安山)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마을은 배산임수의 지형에 동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어 겨울에는 북쪽에서 불어오는 추운 바람을 막아주고,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주는 아늑한 곳이다. 마을 남쪽 안산(案山) 아래에는 넓고 웅장한 바위가 놓여 있었다.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승려가 탄복하면서 이 바위가 유명한 바위라 하며 그 위에 ‘명암(鳴巖)’ 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국가에 대란이 일어나면 바위가 황소처럼 울 것이다.”라고 했다. 그 뒤부터 마을의 이름을 ‘명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러한 전설이 전해오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이때에 바위가 울었다고 한다. 주민들에 의하면 ‘명암’이라고 새겨진 바위는 세 곳에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경술국치(庚戌國恥) 이전에 마을 입구 빨래터에, 다른 하나는 ‘북촌’에, 마지막 하나는 ‘남촌’ 꼭대기에 있었다고 한다. ‘남촌’의 바위는 경술국치(庚戌國恥) 때 울었다고 전한다. 이 바위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 년 전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청주∼충주 간 도로와 철도가 부설되면서 땅 속에 묻히게 되었다. ‘명암’에는 100여 년 전에 동계(洞?)가 설립되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도 동안(洞案)이 남아 있어 상부상조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마을에서 상(喪)을 당하게 되면 옛날에는 동계의 좌목(座目)에 따라 서로 도왔다. 지금은 동민들이 상주를 위로하고, 계원들은 술 한 말씩을 내놓고 있다. 또 이 마을에는 수백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동약(洞約)이 있어 어려움을 서로 나누고 있다. 또한 불효자에 대한 처벌이 매우 엄격하여 볼기를 치기도 하였다고 한다.
  • 화성6리(花城六里) : ,남촌(南村) : 오늘날 화성5리를 이루는 ‘북촌’, 화성6리를 이루는 ‘남촌’, 그리고 화성7리를 이루는 ‘행화촌’은 본래 ‘명암(鳴岩)’,‘울어바우’,‘우레바우’,‘우레바위’,‘우르배’로 불리던 마을이다. ‘남촌’은 ‘명암’ 중 남쪽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화성제방(花城堤防) : ‘명암’ 앞 연암천 가에 있는 둑이다. 마을 이름 ‘화성리’에 기대어 붙인 이름이다.
  • 화성7리(花城七里) : ,행화촌(杏花村) : 오늘날 화성5리를 이루는 ‘북촌’, 화성6리를 이루는 ‘남촌’, 그리고 화성7리를 이루는 ‘행화촌’은 본래 ‘명암(鳴岩)’,‘울어바우’,‘우레바우’,‘우레바위’,‘우르배’로 불리던 마을이다. ‘행화촌’은 ‘북촌’의 남서쪽에 있다. ‘행화촌(杏花村)’은 ‘행화, 즉 살구꽃이 많은 마을’로 풀이된다. 진모랭이 : ‘남촌’에서 증평으로 가는 길에 있는 긴 모퉁이이다. 과거 ‘명암’ 사람들은 이 모퉁이를 통해서 증평장을 보러 다녔다. ‘진모랭이’는 ‘긴모퉁이’의 충청방언형이다. 집너머들 : ‘명암’ 앞 36번국도와 보강천 건너에 있는 들이다. ‘집너머들’은 ‘집너머’와 ‘들’로, ‘집너머’는 ‘집’과 ‘너머’로 나뉜다. ‘너머’는 동사 어간 ‘넘[越]’에 파생접사 ‘어’가 붙어 이루어진 말로, ‘집,담,산,고개 같은 높은 것의 저쪽’이란 뜻을 지닌다. 동사 어간에 파생접사가 붙어 구체적인 장소를 가리키는 예는 매우 흔하다. 예컨대, ‘너미’,‘배기’ 등은 각각 ‘넘다’,‘박다’의 어간 ‘넘’,‘박’에 ‘이’가 붙는 경우요, ‘내기’는 ‘나다[出]’의 어간 ‘나’에 ‘기’가 붙는 경우이다. ‘너머’계 지명은, ‘길게너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산’,‘재’,‘집’,‘당’,‘동산’,‘태봉’,‘성황’ 등 구체적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 전부요소(前部要所)로 쓰인다. ‘집너머’는 골,들,마을 이름으로 전국적으로 사용되는데, ‘집너매’,‘집너메’,‘집너머말’ 등 그 형태가 다양하다. ‘집너머들’은 ‘집 너머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 문화재 ]

,연종록부부정효각(延種祿夫婦旌孝閣) : 연종록과 그의 부인 순흥안씨(順興安氏) 부부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1934년에 연종록의 6대손인 연병택(延秉澤)이 주선해 마을사람들이 세운 정효각이다. 화성1리 ‘성도리’ 91번지 도안초등학교 정문 옆에 있다. 지금의 정효각 건물은 1985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1칸,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목조 기와집이다. 안에는 ‘효자증조봉대부동몽교관곡산연공종록배효부증영인순흥안씨지려상지십년기미구월일명정(孝子贈朝奉大夫童蒙敎官谷山延公種祿配孝婦贈令人順興安氏之閭上之十年己未九月日命旌)’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연종록은 본관이 곡산(谷山)이며 연사종(延嗣宗)의 후손이다. 자는 성복(聖福)이고 호는 모증재(慕曾齋)이다. 연종록은 비록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성품이 온유하고 부지런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는 나무를 해다 팔아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제일 큰 행복으로 여겼다. 40세가 되어 늦게 결혼한 연종록은 더 없는 기쁨이기도 하였다. 또한 그의 아내 순흥안씨 역시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를 정성껏 모시고 일도 열심히 하였다. 그러자 어머니는 며느리의 효심이 깊은 것을 하늘에 감사하고 정한수를 떠놓고 손자를 낳게 하여 달라고 빌었다. 드디어 아들을 얻은 부부는 한없이 기뻐한 나머지 달만 밝으면 밤에도 낮과 같이 열심히 일만 하였다. 열심히 노력한 부부는 생활도 넉넉하여지고 재산도 늘어나 잘 살게 되었는데, 마을에서 칭찬이 자자하였다. 그 후 노모가 병환으로 눕게 되자 가산을 팔아 약을 쓰고 의원을 불러 치료를 다하였으나 병이 회복되지 않았다. 이에 늙으신 어머니의 변을 직접 맛보면서 탕약을 목욕을 하고 자신이 노모 대신에 아플 것을 항상 하늘에 기원하였다. 그는 노모의 병이 위독하게 되자 그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목숨을 연명시킨 효자였다. 그의 부인 순흥안씨도 연종록과 함께 부모를 극진히 공양했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입에 넣어 드렸다. 그러나 이러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노모는 결국 세상을 뜨게 되었다. 부부는 애절하게 통곡을 했으며, 매일 묘소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곡을 해 무릎이 물렀다. 조정에서는 철종 10년(1859)에 부부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연종록에게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중직하고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곡산연문쌍효각(谷山延門雙孝閣) : 효자 연주운(延周運)과 그의 손자인 효자 연면회(延冕會)의 정려를 합설한 쌍효각이다. 화성3리 ‘상작’ 입구 174번지에 있다. 연주운의 정려는 고종 24년(1887)에 내렸고, 연면회의 정려는 고종 29년(1892)에 내렸다. 이때 두 사람의 정려를 함께 설치해 쌍효각이 되었다. 쌍효각 건물은 정면 1칸,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이다. 현판에는 ‘효자문(孝子門)’이라고 되었다. 효자각 안에는 위에 ‘효자성균생원연주운지려상지십삼년정해사월일명정(孝子成均生員延周運之閭上之十三年丁亥四月日命旌)’, 그 아래에 ‘효자증조봉대부동몽교관연면회지려상지십팔년임진오월일명정(孝子贈朝奉大夫童蒙敎官延冕會之閭上之十八年壬辰五月日命旌)’이라는 편액이 나란히 걸려 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시강원 좌빈객 민영상(閔泳商)이 쓴 ‘곡산연씨효자정려기(谷山延氏孝子旌閭記)’가 걸려 있다. 연주운(延周運)은 본관이 곡산으로, 호는 퇴수정(退修亭)이요 자는 성구(性久)이다. 그는 부친의 병이 위독하자 부친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다리를 베어 피를 먹여 목숨을 연명시킨 인물이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정성을 다해 섬기면서 여름이나 추운 겨울에도 10리나 떨어진 부친의 묘소를 매일 돌아봤다고 한다. 아버지의 제삿날에는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것을 멀리 했으며, 고기 없이 반찬을 먹고, 슬퍼하는 것이 상을 당했을 때와 같았다고 한다. 연면회는 어려서부터 효자로 소문이 나 있었다. 학문에도 뛰어난 면이 있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눈병으로 고생하는 어머니를 정성으로 모셨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녹담초(鹿膽草)가 먹고 싶다는 말에 몇 날 며칠 동안 녹담초를 찾아 헤맸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무 밑에서 쉬다가 잠깐 잠이 들었다. 그런데 꿈속에서 산신령이 나타나 강원도 영월 서쪽 강변으로 가보라는 말에 깨어나 곧장 달려가 보니 정말로 녹담초가 있었다. 이것을 가져와 어머니께 정성껏 달여 드렸더니 보이지 않던 눈이 보였다. 또 아버지가 병환이 들어 고생하실 때에는 엄동설한에 얼음을 깨고 고기를 잡아와 드시게 하였다. ,곡산연문효열각(谷山延門孝烈閣) : 화성5리 ‘북촌’에 있다. 이곳은 본래 정조 20년(1796)에 나라에서 세운 연사종의 6대손인 부호군(副護軍) 연진행(延震行)의 처 순흥안씨(順興安氏)의 열녀각이었는데, 1910년에 경기도 양주군에 있던 효자 정후공(靖厚公) 연사종(延嗣宗)의 정려를 옮겨와 합설하였다. 그리고 1916년에는 연사종의 13대손인 연재관(延載寬)의 처 청송심씨(靑松沈氏)의 정려를 함께 복설하였다. 그러다가 순흥안씨의 정려는 1984년에 음성군 원남면 문암리로 옮겨 세워, 현재는 효자 연사종과 효부 청송심씨의 효열만을 기리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정면 2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편액에는 ‘효열문(孝烈門)’이라고 되어 있으며, 그 안의 앞쪽에는 ‘효자추충익대좌명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찬성곡산부원군증영의정시정후공연사종지려(孝子推忠翊戴佐命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贊成谷山府院君贈領議政諡靖厚公延嗣宗之閭)’, 뒤쪽에는 ‘열녀학생연재관처청송심씨지려상지이십년병진십이월일명정(烈女學生延載寬妻靑松沈氏之閭上之二十年丙辰十二月日命旌)’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그 옆에는 1910년에 후손 연명회(延命會)가 지은 ‘정후공정려이건기(靖厚公旌閭移建記)’가 걸려 있다. 연사종(1366~1434)은 상장군 연단서(延丹瑞)의 후손으로, 곡산연씨(谷山延氏)의 실질적인 시조(始祖)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으로 자(字)는 불비(不非)이고, 함흥 출신이다. 연사종은 조선 초기 태조대(太祖代)에서 세종대(世宗代)까지 4대조의 공신을 역임한 큰 인물이었다. 고려 우왕 14년(1388) 요동정벌 때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요동정벌에 참여한 공로로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봉되었으며, 태조 2년(1399)에 회군공신(回軍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태종 1년(1401) 제2차 왕자의 난 때에 정안군파에 가담하였고, 정안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등극하는 과정에서 공로가 많아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었다. 태종 10년(1410) 동북면병마절도사(東北面兵馬節度使)가 되어 여진족의 침입을 방어했으며, 이 해에 길주도도안무찰리사(吉州道都安撫擦理使)가 되어 경원부와 경성에 입성,수복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간룡성 싸움에서 패배하여 탄핵을 받고 함주(咸州)에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1411년 12월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퇴임하였고, 이듬해에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가 되어 함주군 일대에 있는 4조왕과 비의 능(陵)을 조성하고 정비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1413년에 영흥부윤을 겸직했으며, 위의 공로로 인해 곡산군(谷山君)에 봉해졌다. 이듬해에 노모의 병환을 간호하기 위해 사직하려 하였으나 허가받지 못하다가 왕으로 시연(侍宴)을 받고 휴가를 받았다. 그는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흙 베개를 베고 초막에서 시묘살이를 하여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았다. 모친상을 마치고 태종 16년(1416)에 다시 등용되어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가 되었고, 태종 18년(1418)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갔다 오면서 의서와 약재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세종 1년(1419)에 훈신에 대한 예우로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에 오르고, 세종 4년(1422)에 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세종 8년(1426)에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를 역임하였다. 연사종의 묘소는 서울시 성북구 하계동에 있었으나, 개발로 인하여 지금은 화성리 ‘명암’의 주실산 묘역에 모셔져 있다. 또한 경기도 양주서원에 있던 정려도 ‘명암’으로 이전하여 보호하고 있다. 청송심씨는 정조 16년(1796)에 남편이 죽자 따라 죽을 것을 결심하고 남편의 시신 염습을 마친 후 6일 후에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1984년에 음성군 원남면 문암리로 옮겨진 순흥안씨 정려는 문암리 ‘사오랑이’ 입구에 있다. 열녀문은 정면 1칸,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사면을 홍살로 두르고 양옆에 풍벽을 달았다. 정려각의 편액에는 ‘열녀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연진행처정렬부인순흥안씨지려(烈女折衝將軍行龍?衛副護軍延震行妻貞烈夫人順興安氏之閭)’라 하였고, 앞 처마에는 ‘열녀문(烈女門)’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또한 정려각 바로 옆에는 1987년에 연윤희(延潤熙)가 찬(撰)하고 연순흠(延舜欽)이 서(書)한 ‘정렬부인순흥안씨효열비(貞烈夫人順興安氏孝烈碑)’가 서 있다. 순흥안씨는 부호군(副護軍) 연진행(延震行)의 부인으로 병자호란 때 가족과 함께 피난을 갔다가 다음 해 조상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돌아왔는데, 이때 청군이 침입하자 남편을 위해 적의 칼을 막다가 함께 죽어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았다. 정조 20년(1796)에 세워졌다. 순흥안씨의 남편 연진행의 묘소는 행정구역상 광덕리에 속하는 구계 북쪽, ‘사오랑이’ 입구의 남쪽에 북쪽을 바라보며 있다. 묘비와 상석에 모두,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곡산연공진행지묘배정렬부인순흥안씨부(折衝將軍行龍?衛副護軍谷山延公震行之墓配貞烈夫人順興安氏?)’라 하였다. ,연사종묘표(延嗣宗墓表)와 신도비(神道碑) : 정후공 연사종의 묘소는 본래 서울시 노원구 하계동 평원일대의 곡산연씨 묘역에 있었다. 1990년 9월 17일에 도안면 화성리 ‘명암’ 뒤쪽에 있는 주실산의 곡산연씨 묘역으로 이장하여, 매년 음력 10월 1일에 시제를 지내고 있다. 묘비 또한 묘소를 이장하면서 함께 옮겨와, 묘소 앞에 세웠다. 비문은 영조 30년(1754)에 외손 민우수(閔愚洙)가 지었고, 글씨는 송명흠(宋明欽)이 썼다. 신도비는 묘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황희(黃喜)가 찬(撰)한 1440년의 비문을 1959년에 후손인 연종혁(延鍾赫),연명일(延明一),연규영(延圭瑛)의 노력으로 다시 세웠다. ,연음묘표(延陰墓表)와 신도비(神道碑) : 회양부사(淮陽府使) 연음(延陰: 1418~1452)의 묘소는 연사종의 묘소 바로 아래 그의 둘째 형인 연비(延庇)의 묘소 옆에 있다. 이 또한 서울시 노원구 하계동에서 1973년에 이장한 것이고, 그의 형 묘소는 1990년에 이장한 것이다. 연음의 묘표는 정조 3년(1779)에 10대손 연동헌(延東憲)이 쓴 것이다. 또한 1973년에 새로 신도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후손인 연규복(延圭復)이 짓고 썼다.

[ 민속행사 ]

,산신제(山神祭) : ‘명암’에서는 전통적으로 음력 동짓달이 되면 모든 주민들이 마을 뒷산 최고봉에서 산신제를 드리고 있다. 처음에는 산신당(山神堂)이 있어 그곳에서 산제(山祭)를 올렸으나, 1978년 공비의 은신처가 된다고 하여 산신당을 없애 버렸다. 그러나 같은 자리에서 매년 산신제를 지내고 있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산신제는 ‘명암’ 주민 전체가 합심하여 지내는데, 과거에는 마을 주민들의 각출에 의해서 행해졌으나 지금은 마을 공동기금으로 지내고 있다. 산신제를 지내기 전에 마을 원로회의에서 산제일을 비롯하여 제관(祭官)을 선출한다. 옛날에는 산제일을 매년 따로 길일을 택하였으나, 몇년 전부터는 매년 음력 동짓달 초이튿날로 정하였다. 제관은 대체적으로 3일 전에 생기 복덕(生氣福德)에 맞는 사람을 선출한다. 최근에는 생기 복덕을 보는 것은 생략하고 초상이 나지 않거나 부정이 없는 깨끗한 집을 선정하여 제관을 뽑고 있다. 제일(祭日)이 잡힌 후에 상을 당하면 장사를 지낸 후에 다시 좋은 날을 잡아 지냈다. 제관이 선출되면 이들에게는 산제통문(山祭通文)을 보낸다. 그리고 제관으로 뽑힌 사람들의 집에다 왼새끼를 꼬아 창호지를 끼워 대문에 걸고, 황토 흙을 떠다가 한 군데에 세 삽씩 모두 여섯 삽을 놓는다. 이 통문을 받은 제관은 목욕재계하면서 근신하게 되는데, 이와 함께 마을 사람들도 모두가 3일 전부터 기도를 행한다. 이러한 마을 제의에 참여하는 제관들에게는 부부합방이나 부정한 일 보는 것을 금하는 등 엄격한 금기사항이 적용되었다. 또한 마을 사람들까지 비린 것을 먹지 않았다. 그래서 새우젓이 들어간 김치조차도 먹지 않고, 비린 것이 들어가지 않은 김치만 먹었다. 또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집안에서 큰 소리가 나지 않게 해야 했으므로 아이들이 잘못해도 꾸지람을 하지 않았다. 또 이도 잡지 않았다 한다. 과거에는 산신당에서 금줄을 치고 근신하였으나 산신당이 없어진 지금은 마을의 노인정에서 금줄을 치고 근신하다가 제일(祭日)인 음력 11월 2일 자시(子時)에 제(祭)를 올린다. 산제를 지내는 곳은 마을의 뒷산에서 가장 높은 곳인 상봉(上峯, 또는 上山峯)이다. 이 상봉은 옛날 괴산군에 가뭄이 들었을 때도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제물로는 술,과일,포 등을 준비하는데, 이 마을의 산신제에서 특징적인 것은 제사에 통돼지를 그대로 쓴다는 점이다. 돼지는 깨끗한 집에 가서 수퇘지를 골라 값은 달라는 대로 주고 사온다. 제물은 여자들이 일체 만지지 못했고, 제관들도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간장과 김만을 반찬으로 먹었다. 제사에는 제관 3명뿐만 아니라, 동민 전체가 참여하는데 먼저 제물을 올리고 그 다음에 현관이 술을 올리고 축문을 읽는다. 이때 상봉 신령에게 백배(百拜)와 축문을 올리는데, 축문은 한 번 배례할 때마다 한 번씩 읽어 100번 절하고 백 번 축문을 읽는 전통이 있다. 축문은 매년 제관에 따라 내용이 약간씩 다르지만, 주로 마을의 평안과 풍농(?農)을 기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산신제가 끝나면 마을의 최고령자를 찾아가 산신 제물로 음복하도록 하고 있다. 산제를 지내는 날은 집집마다 ‘마중시루’를 쪄서 ‘불밝이’를 해서 기도를 드리기도 하였다. 산신제 다음날에는 마을의 대동계(大洞?)가 열리는데, 마을에 대한 크고 작은 일은 물론, 마을 발전을 위한 내용을 상의한다. 이때 선행자도 선정하여 표창한다. 한편 산제 날짜가 정해진 후에 마을에 들어온 손님은 산신제가 끝나기 전에는 마을을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전통이 있다. 그리고 ‘까치고개’에는 서낭당이 있었으나 새마을운동으로 지금은 없어졌다. 참고로 ‘산제통문’과 ‘연초산신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