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의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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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면

행갈마을과 진등마을이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마을

노암리(老岩里)

[ 연혁 ]

노암리(老岩里)는 본래 조선시대 청안현(淸安縣) 북면(北面) 지역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 기록에는 청안현 북면에 33개리가 있었다. 그 중에서 현재의 노암리와 관련된 마을로는 노고곡상리(老顧谷上里),백암리(白岩里),대지곡리(大支谷里),노고곡하리(老顧谷下里) 등 4개리가 있었다. 그 뒤 노암리는 건양(建陽) 원년(1895)에 청안현(淸安縣)이 청안군(淸安郡)으로 승격되면서 청안군의 6개면인 읍내면(邑內面),동면(東面),남면(南面),북면(北面),서면(西面),근서면(近西面) 중에서 북면(北面)에 속하는 지역이 되었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서도 당시 청안군 북면은 33개리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 사이 노고곡상리(老顧谷上里)는 노상리(老上里)로, 노고곡하리(老顧谷下里)는 노하리(老下里)로 지명이 바뀌었으며, 신곡리(新谷里)가 새로 생겼다. 1914년에 일본제국주의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도안면(道安面)은 7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따르면, 노암리는 북면 노상리(老上里),백암리(白岩里),대지곡리(大支谷里),신곡리(新谷里),노하리(老下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만들었다. 이때 노상리,노하리와 백암리의 이름을 따서 노암리(老岩里)라고 하고, 괴산군 도안면에 편입하였다. 광복 이후 1948년 8월 15일에 정부가 수립되고, 동년 11월 17일에 법률 제8호 「지방 행정에 관한 임시 조치법」이 제정ㆍ공포됨에 따라 괴산군 도안면 노암리가 되었다. 1990년 12월 31일에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괴산군 도안면에서 충청북도증평출장소(忠淸北道曾坪出張所)로 바뀔 때, 노암리는 도안지소(道安支所) 관할이었다.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도안면 노암리가 되었다.

[ 유래 ]

노암리(老岩里)는 1914년에 노상리(老上里),노하리(老下里)와 백암리(白岩里)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노암리는 도안면사무소에서 서북쪽 3km 거리에 있다. 두타산에서 이성산에 이르는 능선이 증평읍 미암리와 경계를 이루고, 두타산 정상에서 진천군 초평면과도 경계를 이룬다. 북쪽으로는 연촌리, 동북쪽으로는 송정리, 동쪽으로는 화성리와 접해 있다. 2010년 5월 현재 170세대에 402명이 거주하고 있다.

  • 노암1리(老岩一里) : 행갈/황포(黃浦) : ‘행갈’은 노암1리 중심마을이다. ‘역전’에서 ‘행정고개’ 너머에 있는 마을이다. ‘행갈’은 이성산 동쪽에 자리 잡은 마을로 면사무소가 위치한 화성리에서 서쪽으로 2.3km 떨어져 있다. ‘행갈’의 동쪽에는 화성3리가, 서쪽에는 증평읍 미암4리 ‘시화’가, 남쪽에는 증평읍 미암5리가, 북쪽에는 ‘진등’이 접해 있다. ‘행갈’의 뜻이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경북 상주시 외서면 봉강리 ‘행갈’[마을]에는 지명과 관련된 전설이 전한다. 예전에 염백호라는 사람이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던 바, 염백호가 죽은 후 산 칡이 은행나무까지 내려와서 3년간이나 띠를 두르고 흰 꽃이 피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 마을을 ‘은행나무’와 ‘칡’을 관련시켜 ‘행갈(杏葛)’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행갈’은 지금부터 대략 500여 년 전 청주한씨(淸州韓氏) 정혜공파 한상례(韓尙禮)가 충남 연기군 전의에서 화성리 ‘명암’을 거쳐 이곳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곡산연씨 등이 차례로 입촌하면서 현재의 마을을 이루었다. ‘행갈’은 일제 강점기 이후 ‘황포(黃浦)’로 불렸으나, 최근에 다시 본래 마을 이름을 살려 ‘행갈’로 부르고 있다. ‘황포’라는 이름은 옛날 마을 한복판으로 개울이 흘렀는데 비가 많이 오고 난 후면 마을에 누런 흙탕물이 범람했다고 해서 붙은 것이다. 상촌(上村) : ‘행갈’ 남쪽 ‘단지배골’ 앞에 있는 마을이다. ‘상촌’은 ‘행갈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진등/신곡(新谷) :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에는 이 마을과 관련된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신곡(新谷)’으로 불리던 곳이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新谷/진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마을은 ‘뇌실’ 남쪽 긴 등성이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따라서 붙은 이름이 ‘진등’이다. 원래 이 마을은 ‘행갈’에 속한 마을이었으나, 마을이 커지자 1912년 이전에 분리된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이 ‘행갈’에서 분리되면서 ‘신곡’이라고 불린 것이다. ‘산곡’은 ‘새로 생긴 마을’을 뜻한다. ‘진등’은 연이찬이 약 360여 년 전에 송정리에서 입향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충주지씨,청주한씨,나주라씨 등이 입촌하면서 현재의 마을을 이루었다. ‘진등’은 이성산에서 북동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에 있는 산촌 마을이다. 마을 양 옆으로 산줄기가 있어 마치 삼태기 안에 마을이 있는 듯이 아늑하다. 이 마을은 도안면사무소[화성리]에서 서쪽으로 2km 떨어져 있다. 마을 동쪽에는 화성1리가, 서쪽에는 증평읍 미암4리 ‘대지랭이’가, 남쪽에는 ‘행갈’이, 북쪽에는 ‘뱀티’가 있다. ‘진등’에는 예전에 ‘행갈’과 공동으로 지내는 산신제와 용왕제가 있었다. 이 같은 마을 공동생활을 하기 위하여 100여 년 전에 ‘행갈’과 공동으로 구성된 대동계와 ‘진등’ 단독으로 구성된 소동계가 있다. 소동계는 60년 전에 구성되었으며, 계금은 자연마을 자금으로 쓰인다. 그리고 예전에는 농악대가 있어서 음력 7월 15일[백중], 음력 1월 15일[대보름]에 농악놀이를 하였으나 현재는 사라졌다. 일제시대 ‘진등’에는 야학이 개설되었는데, 이 당시 불리던 야학 동요는 다음과 같다.
  • 노암2리(老岩二里) :뱀티/백암(白岩) : ‘뱀티’는 두타산에서 뻗어 내린 산등성이에 자리 잡은 산촌마을이다. 이 마을 동쪽에는 ‘둥구머리’가, 서쪽에는 증평읍 미암4리 ‘대지랭이’가, 남쪽에는 ‘진등’,‘행갈’이, 북쪽에는 ‘뇌실’이 접해 있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에는 ‘백암리(白巖里)’로 표기되어 있고,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는 지금과 같은 ‘백암(白岩)’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白岩/?틔’로 기록되어 있다. 이 마을은 북쪽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산등성이가 마치 뱀처럼 길게 뻗어져 있어서 ‘뱀티’로 불렸다. 풍수(風水)로 보면 장사추와형(長蛇追蛙形)의 명당이라 한다. 주민들의 전언에 따르면, 일제가 뱀의 허리 부분에 해당하는 곳을 잘라 신작로(新作路)를 냈기 때문에 마을이 발전하지 못한다고 한다. 다른 이름 ‘백암’은 마을 뒷산에 있는 바위가 하얀빛을 띠고 있어 붙인 이름이다. 이 바위는 현재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이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언제부터인가 마을에는 우환이 그치지 않았다. 주민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전전긍긍하던 차에 이름난 풍수가(風水家)로부터 “마을에서 백암이 뚜렷하게 보이기 때문에 우환이 그치지 않는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에 마을에서 백암이 보이지 않도록 큰 나무를 심어 백암을 가렸다. 이후로 마을에는 우환이 그쳤다 한다. ‘뱀티’는 대략 280여 년 전에 청주한씨 정혜공파 한필상(韓必相)이 입향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원주원씨,충주지씨,전주이씨,광주안씨,파평윤씨 등이 입촌하고, 그 후에 곡산연씨가 들어와 마을이 구성되었다. 현재 ‘뱀티’는 ‘양달말[양짓말]’과 ‘음달말’로 나뉘어 있다. ‘양달말[양짓말]’은 ‘뱀티’ 중 북쪽에 있는 마을로, 항상 햇빛이 든다. ‘음달말’은 ‘뱀티’ 중 남쪽에 있는 마을로, 햇빛이 잘 들지 않는다. 곰수골[-沼-]/광수골[-沼-]/광수곡[-沼谷] : ‘뱀티’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광수골’에는 넓은 바위가 있는데, 바위 가운데가 자연적으로 둘로 갈라져 있다. 이 갈라진 바위틈으로 속을 들여다보면 양쪽에 물 수(水)자가 쓰여 있다고 한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광수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유래설은 설득력이 약하다. 우리는 ‘곰수골’,‘광수골(光水-)’,‘광수곡(光水谷)’ 중 ‘곰수골’을 기저형으로 삼아 설명한다. ‘곰수골’은 ‘곰소골’의 변화형이다. ‘곰소골’은 ‘곰소’와 ‘골’로, ‘곰소’는 다시 ‘곰과’ 소’로 나뉜다. ‘쇰’은 ‘크다[大]’를 뜻하는 ‘?’과 관련되고, ‘소’는 ‘소(沼)’이다. 따라서 ‘곰소골’이나 변화형 ‘곰수골’은 ‘큰 못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따라서 ‘광수골(光水-)’,‘광수곡(光水谷)’의 뜻도 곰수골과 같다. ‘?’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연탄1리 ‘궁골’을 참고하기 바란다. 구렁너머골 : ‘뱀티’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구렁너머골’은 ‘구렁너머’과 ‘골’로, ‘구렁너머’는 다시 ‘구렁’과 ‘너머’로 나뉜다. ‘구렁’은 ‘땅이 움쑥 패어 들어간 곳[壑谷]’을 뜻한다. 따라서 ‘구렁너머골’은 ‘땅이 움쑥 패어 들어간 곳 너머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귀신골(鬼神-) : ‘뱀티’에서 남쪽에 있는 이성산으로 오르는, 긴 골짜기이다. ‘귀신골’은 ‘귀신’과 ‘골’로 나뉘며, ‘귀신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예전에 아이들이 죽으면 이곳에 묻었고, 따라서 주민들은 귀신이 있다고 믿었다. 너분골/너분날골/높은날골 : 뱀티마을회관에서 마을 뒤 두타산으로 가는 골짜기이다. ‘너분골’은 ‘너분’과 ‘골’로 나뉜다. ‘너분’은 ‘넓은’의 변화형이니, ‘너분골’은 ‘넓은 골짜기’로 풀이된다. 달리 ‘너분날골’로도 불리는데, 이는 ‘너분날’과 ‘골’로, ‘너분날’은 다시 ‘너분’과 ‘날’로 나뉜다. ‘날’은 원래 ‘베거나 찍거나 깎도록 된, 연장의 가장 날카로운 부분’을 뜻한다. 주로 산 이름에 사용되는데, 산등성이의 뾰족한 모습과 연장 날의 날카로운 모습이 형태상 유사하기 때문에 지명의 후부요소로 전용된 것이다. 따라서 ‘너분날골’은 ‘넓은 날카로운 산줄기 부근의 골짜기’로 풀이된다. ‘높은날골’은 ‘높은날’과 ‘골’로, ‘높은날’은 다시 ‘높은’과 ‘날’로 나뉜다. 따라서 ‘높은날골’은 ‘높고 날카로운 산줄기 부근의 골짜기’로 풀이된다. 이 골짜기는 해발고도가 마을보다 높다. 따라서 붙은 이름이 ‘높은날골’이다. 농골 : ‘뱀티’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농골’은 ‘논골’의 연구개음화 어형이다. 그리고 ‘논골’은 ‘논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현재 ‘삽 공장’이 들어서 있다. 당고개(堂-) : 뱀티마을회관에서 ‘뇌실’로 가는 고갯길이다. 현재 포장 소로(小路)가 되었다. 예전에 연촌리 사람들이 증평장을 보러 가기 위하여 넘나들던 고개이다. ‘당고개’는 ‘당’과 ‘고개’로 나뉜다. 여기서 ‘당’은 ‘산신당’으로, ‘당고개’는 ‘산신당이 있는 고개’로 풀이된다. 이 고개는 ‘뇌실’ 뒤쪽에 있는 산신당 앞으로 이어져 있다. 똥골 : ‘뱀티’에서 증평읍 미암4리 ‘대지랭이’로 갈 때 넘는, ‘옥고개’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뱀티’에서 ‘똥골고개’를 넘어가기 전 왼쪽에 있다. ‘똥골’은 ‘똥’과 ‘골’로 나뉘며, ‘똥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예전 이곳에는 겨울철에 웅덩이를 만들어 인분을 모아두었다. 그리고 전에는 광산이 있었다. 똥골고개 : ‘똥골’에서 증평읍 미암4리 ‘대지랭이’로 갈 때 넘던 고개이다. 현재 2차선포장도로가 되었다. ‘똥골고개’는 ‘똥골’과 ‘고개’로 나뉘며, ‘똥골에 있는 고개’로 풀이된다. 무님이저수지(-貯水池) : ‘뱀티’ 북쪽, ‘당고개’ 밑에 있는 소류지이다. ‘무니미저수지’는 ‘물넘이저수지’의 변화형이다. ‘물넘이저수지’에서 치조음 ‘ㄹ’이 탈락하여 ‘무넘이저수지’가 되고 모음변동에 의해 ‘무니미저수지’가 된 것이다. 최초의 어형 ‘물넘이저수지’는 ‘물이 넘는 저수지’로 풀이된다. 별심제들 : ‘뱀티’ 동남쪽에 있는 들이다. ‘별심제들’은 ‘별심제’와 ‘들’로, ‘별심제’는 ‘별심’과 ‘제’로 나뉜다. 여기서 ‘별심’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다. 혹시 ‘별신굿’과 관련 있는지 모르겠다. ‘별신굿’은 ‘무당들이 하는 굿의 일종’이다. 산골(山-) : ‘똥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산골’은 ‘산’과 ‘골’로 나뉘며, ‘산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옥고개(獄-)/옥현(獄峴) : ‘뱀티’에서 증평읍 미암4리 ‘대지랭이’로 갈 때 넘는 고개이다. 현재 ‘천주교공원묘지’가 있는 고개로, 옛날 옥(獄)이 있었다고 전한다. 현재 2차선포장도로이나 곧 4차선으로 확장될 계획이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玉峴/옥고?’로 기록되어 있어, 예전에 옥(玉)이 났던 곳이 아닌가 추정해 볼 수 있다. 옥고개골(獄-) : ‘옥고개’ 근처에 있는 들이다. ‘뱀티’ 서쪽으로, 두타산과 이성산이 연결되는 골짜기이다. ‘옥고개골’은 ‘옥고개’와 ‘골’로 나뉘며, ‘옥고개 근처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포강저수지(-貯水池) : ‘뱀티’ 서쪽에 있는 저수지이다. ‘포강’은 ‘늪’의 방언형이다. 따라서 ‘포강저수지’는 ‘늪으로 된 저수지’로 풀이된다.
  • 노암3리(老岩三里) : 뇌실/노실/노곡(老谷)/노상(老上)/신명(新明) : ‘뱀티’ 북쪽에 있는 마을로, ‘뇌실’,‘노실’,‘노곡’,‘노상(老上)’,‘신명(新明)’ 등으로 불린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에 ‘노고곡상리(老顧谷上里)’와 ‘노고곡하리(老顧谷下里)’가 보인다. 그러나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는 ‘노상리(老上里)’와 ‘노하리(老下里)’로 기록되어 있어, 1912년 이전에 마을 이름이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老上/뇌실’로 기록되어 있다. ‘노실’은 일제시대 이후 ‘신명(新明)’으로 불려오다가 최근에 다시 옛 이름인 ‘뇌실’로 고쳐 부르고 있다. ‘뇌실’은 ‘뇌’와 ‘실’로 나뉜다. 경기도 김포시 양촌면 학운리의 ‘뇌머리[산]’는 달리 ‘뉘머리’로도 불리며, ‘누에머리’와 관련된다. 그렇다면 본 예의 ‘뇌’도 ‘누에’로 풀이된다. 그리고 ‘실’은 ‘마을’의 뜻이다. 따라서 ‘뇌실’은 ‘누에 마을’로 풀이된다. 과거 누에를 많이 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이름 ‘노실’은 ‘뇌실’과 같은 뜻이고, 한자로는 ‘노곡(老谷)’으로 쓰는데, ‘노(老)’는 ‘노실’에 대한 음차표기에 불과하다. ‘뇌실’은 두타산에서 북동쪽으로 뻗어 내린 산 남쪽에 자리 잡은 산촌마을이다. 이 마을은 도안면사무소가 있는 화성리에서 서쪽으로 5km 떨어져 있다. 이 마을 동쪽에는 ‘둥구머리’가, 서쪽에는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가, 남쪽에는 ‘뱀티’가, 북쪽에는 연촌리가 접해 있다. 마을 역사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현재 살고 있는 성씨 중 가장 오랜 연원을 가진 성씨를 찾아서 추정해 본다. ‘뇌실’은 고려 초기에 경주이씨가 입향하면서 마을이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경주이씨와 관련된 유적이 모두 없어져 이것으로 마을 역사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경주이씨 다음으로 오래된 성씨는 청주한씨이다. 지금부터 약 250여 년 전에 ‘뱀티’에서 한시형(韓始亨),한시정(韓始正) 형제가 입촌하였다. 그 후 경주최씨,진주강씨,곡산연씨,충주지씨,밀양박씨,죽산박씨 등이 입촌하면서 현재의 마을을 이루었다. 이 마을의 부녀회는 공동으로 방앗간을 운영하고 있다. ‘뇌실’에는 예전부터 지내던 산신제가 있다. 예전에는 음력 정월 보름에 산신당에서 지냈는데, 산신당 터는 아직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연화사’가 생긴 이후 현재는 ‘연화사’에서 정월 보름 무렵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이 외에도 각 가정에서 용왕제를 지내고 있으며, ‘연화사’에서 칠성을 지내고 있다. ‘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사곡2리 ‘밤실골’을 참고하기 바란다. 가마골 : ‘뇌실’ 북쪽에 있는 저수지이다. ‘가마골’은 ‘가마’와 ‘골’로 나뉜다. 여기서 가마는 ‘부(釜)’의 뜻으로, 예전에 도자기 가마가 있어 붙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를 달리 풀이할 수도 있다. ‘가마’는 ‘?’과 관련된 말이다. ‘?’ 계 지명은, 가장 흔한 모습이 ‘?>감’에 조음소 ‘아’가 개재된 ‘가마’인데, 때로는 ‘감’,‘검’,‘금’,‘가매’,‘고마’,‘가미’,‘가무’,‘개마’,‘개매’ 등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들은 ‘신(神)’이나, 여기서 발전한 ‘크다[大]’를 뜻하게 된다. 이런 설명에 따른다면, ‘가마골’는 ‘큰 골짜기’로 풀이된다. ‘?’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연탄1리 ‘궁골’을 참고하기 바란다. 까치남골/까치낭골 : ‘뇌실’ 뒤[남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까치남골’은 ‘까치’와 ‘남골’로 나눌 수도 있고, ‘까치남’과 ‘골’로 나눌 수도 있다. 여기서 ‘까치’는 ‘작다’ 또는 ‘까치[鵲]’를, ‘남’은 ‘나무’를 뜻한다. 따라서 전자는 ‘작은, 나무가 많은 골짜기’로, 후자는 ‘까치가 서식하는 나무가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까치낭골’은 ‘까치남골’의 연구개음화 어형으로, 그 뜻은 ‘까치남골’과 같다. 노비골(鷺飛-) : ‘뇌실’에 있는 골짜기이다. ‘노비골’은 ‘노비’와 ‘골’로 나뉜다. 지역에 따라서는 ‘노비산’이 ‘제비산’과 병용되는 예가 있다. 그리고 경북 달성군 하빈면 대평리의 ‘노비재’[고개]는 ‘느빗재’로도 불린다. 이 고개에는 전설이 전한다. 조선시대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가 이곳에서 쉬다가 해오라기가 나무에 앉았다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는 급제하였다 한다. 그렇다면 ‘노비골’은 ‘해오라기가 나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뇌실제(-堤) : ‘뇌실’ 입구에 있는 소류지이다. ‘뇌실제’는 ‘뇌실’과 ‘제’로 나뉘며, ‘뇌실에 있는 저수지’로 풀이된다. 안골 : ‘뇌실’ 옆에 있는, 구렁으로 된 들이다. ‘안골’은 ‘안’과 ‘골’로 나뉘며, ‘안쪽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현재 축사[돈사]가 들어서 있다. 앵사당골[鸚巢洞-]/앵소당골[鸚巢洞-] : ‘뇌실’ 뒤[남서쪽]로, 두타산에 이르는 골짜기이다. ‘앵사당골’이나 ‘앵소당골’은 ‘앵소동골’의 변화형이다. ‘앵소동골’은 ‘앵소동’과 ‘골’로, ‘앵소동’은 다시 ‘앵소’와 ‘동’으로 나뉜다. ‘앵소’는 ‘앵소(鸚巢)’로, ‘꾀꼬리 집’을 뜻한다. 따라서 ‘앵소동골’은 ‘꾀꼬리집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다만 ‘골짜기’를 뜻하는 ‘동(洞)’과 ‘골’의 유의중복 어형이다. 장터 : ‘뇌실’에 있는 터이다. ‘장터’는 ‘장’과 ‘터’로 나뉘며, ‘장이 서는 터’로 풀이된다. 이곳은 고려 때 장이 섰다고 전한다. 그러나 고려 때 장이 섰다는 기록을 찾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장터’를 달리 풀이할 수도 있다. 여기서 ‘장’을 ‘장치기’로 이해한다면 ‘장치기를 하는 터’로 풀이할 수 있다. ‘장치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장동리 유래’를 참고하기 바란다.
  • 노암4리(老岩四里) : 둥구머리/괴정(槐亭)/노하(老下) : ‘둥구머리’는 두타산에서 북동쪽으로 뻗어 내린 산 남동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이 마을 동쪽에는 송정5리 ‘가무지’가, 서쪽에는 ‘뇌실’이, 남쪽에는 ‘진등’,‘행갈’이, 북쪽에는 송정2리 ‘통미’가 접하고 있다. ‘둥구머리’는 ‘둥구’와 ‘머리’로 나뉜다. ‘둥구’는 ‘둥구나무, 즉 크고 오래 된 정자나무’를, ‘머리’는 ‘한쪽 옆이나 가장자리’를 뜻한다. 따라서 ‘둥구머리’는 ‘둥구나무가 있는 마을’ 정도로 풀이된다. ‘괴정’은 ‘느티나무 정자’를 뜻한다. 이 마을 초입에는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이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그러나 느티나무는 현재 없어져 수령이나 크기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마을사람들에 따르면 수령이 400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 고장을 개척한 선조들이 봄놀이 때 심었다고 한다. 이 느티나무는 어른 7명이 양팔을 벌려야만 손이 닿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나무였다. 국난이 있을 때 밤에 울었다고 하며 현재 이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한국전쟁 때 경험했다고 한다. 현재는 새로 심은 느티나무가 서 있다. 이 마을은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에는 ‘노고곡하리(老顧谷下里)로,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는 ‘노하(老下)’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老下/둥구머리’로 기록되어 있다. ‘둥구머리’는 약 400여 년 전에 생성되었으며, 초기에 청주한씨,곡산연씨,권씨,정씨 등이 입촌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밀양손씨,충주임씨,상산김씨,곡산연씨,충주지씨 등이 차례로 입촌하면서 현재의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의 대소사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하여 1990년 1월 10일 대동계에서 만들어진 연반계가 잘 운영되고 있다. 특히 경로사상 고취를 위하여 70세 이상 노인들에게 매년 일정액의 경로효친비를 지급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강아지밭골 : ‘괴정저수지’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강아지밭골’은 ‘강아지’와 ‘밭골’로 나뉜다. 여기서 ‘강아지’는 동물을 뜻한다. 다만 강아지가 이 골짜기와 어떻게 관련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괴정저수지(槐亭貯水池)/오리샘 : ‘괴정’ 북쪽에 있던 저수지이다. 1952년 8월에 착공하여 1957년 11월에 준공하였다. ‘괴정저수지’는 ‘괴정’과 ‘저수지’로 나뉘며, ‘괴정에 있는 저수지’로 풀이된다. 달리 ‘오리샘’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오리가 많이 서식하는 저수지’로 풀이된다. 현재는 경지정리로 인해 사라졌다. 금방앗간터(金-) : ‘둥구머리’와 송정1리 ‘입장’ 사이에 있던 제련소이다. ‘금방앗간터’는 ‘금방앗간’과 ‘터’로, ‘금방앗간’은 다시 ‘금’과 ‘방앗간’으로 나뉜다. 따라서 ‘금방앗간터’는 ‘금을 제련하는 터’로 풀이된다. 이 제련소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없어졌으며, 현재는 ‘둥구머리’ 지광정 씨 논으로 경작된다. 노암광산(老岩鑛山)/송정광산(松亭鑛山) : ‘둥구머리’와 송정1리 ‘입장’ 사이에 있던 금광이다. 1937년에 개발되어 1944년에 폐광되었다. ‘노암광산’은 ‘노암’과 ‘광산’으로 나뉘며, ‘노암리에 있는 광산’으로 풀이된다. 이곳은 송정1리와도 가까워 달리 ‘송정광산’으로도 불렀다. 두리봉[-峰] : ‘둥구머리’ 서남쪽에 있는 산이다. ‘두리봉’은 ‘두루봉’의 변화형이다. ‘두루봉’은 ‘두루’와 ‘봉’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두루’는 ‘두르다[휘감아 싸다]’의 어간 ‘두르’의 변화형이다. 지명에서 ‘두루’는 ‘두루미’,‘두루바우’,‘두우배미’,‘두루산’ 등에서 발견되는데, ‘휘감아 싸다’를 뜻한다. 한자로는 ‘둥글다 圓’이 대응된다. 따라서 ‘두루봉’은 ‘휘감아 싼 봉우리’로 해석된다. ‘두루봉’은 지역에 따라서는 ‘두로봉’,‘두류봉’,‘두리봉’으로도 나타난다. 이 산의 꼭대기에는 쇠말뚝이 박혀 있는데, 이 쇠말뚝을 똑바로 쳐다보면 벼락을 맞는다는 속신(俗信)이 전했다. 그래서 쇠말뚝 주위에는 가능한 한 접근하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인가 고물장수가 쇠말뚝을 골동품으로 뽑아갔다고 한다. 만비기밭골 : ‘벼루재골’ 바로 밑[남쪽]에 붙어 있는 골짜기이다. ‘만비기밭골’은 ‘만복이밭골’의 변화형이다. 즉 ‘만복이밭골’이 이모음역행동화에 의해 ‘만뵉이밭골’로, 다시 모음변동에 의해 ‘만비기밭골’로 실현된 것이다. ‘만복이밭골’은 ‘만복이밭’과 ‘골’로, ‘만복이밭’은 ‘만복이’와 ‘밭’으로 나뉜다. ‘만복이’는 ‘만복’에 접미사 ‘이’가 붙은 어형이다. 여기서 ‘만복’은 인명일 수도 있고, ‘만복(萬福), 즉 복이 많음’이나 ‘만복(滿腹), 즉 음식을 먹어 뱃속이 가득 참’으로 볼 수도 있다. 수터골 : ‘둥구머리’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수터골’은 ‘숯터골’의 변화형이다. ‘숯터골’은 ‘숯터’와 ‘골’로 나뉘며, ‘숯을 굽던 터가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연암골(硯岩-) : ‘둥구머리’ 북서쪽으로, 두타산을 오르는 골짜기이다. ‘연암골’은 ‘연암’과 ‘골’로 나뉘며, ‘벼루돌이 나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이곳은 예전에 ‘연암’ 즉 ‘벼루돌’을 채취하던 곳이다. 베루재/베루재고개/연현(硯峴)/서낭당베루재 : ‘괴정저수지’ 위[북쪽]에 있는 고개이다. ‘둥구머리’에서 송정1리 ‘입장’이나 연촌리로 갈 때 넘는 고개이다. 이 고개로 인해 마을 이름 ‘베루재’[연촌리]가 유래되었다. ‘베루재’는 ‘베루’와 ‘재’로 나뉘며, ‘벼루돌이 나는 고개’로 풀이한다. 그러나 ‘베루재’를 달리 풀이할 수 있다. 지명에서 ‘벼랑’은 매우 다양하게 실현된다. ㉠ ‘바람’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바람고지’,‘바람골’,‘바람들’,‘바람말’,‘바람모팅이’,‘바람바우’,‘바람실’,‘바람재’ 등이 그 예이다. ㉡ ‘바랑’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바랑골’,‘바랑끝’,‘바랑날’,‘바랑들’,‘바랑말’,‘바랑메’,‘바랑바구’,‘바랑배미’ 등이 그 예이다. ㉢ ‘벼루’로 나타나기도 하니, ‘벼루고개’,‘벼루들’,‘벼루말’,‘벼루모탱이’,‘벼루배미’,‘벼루재’ 등이 그 예이다. ㉣ ‘벼락’이나 ‘베락’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벼락산’,‘벼락고개’,‘벼락골’,‘벼락바위’,‘벼락배미’,‘베락골’,‘베락매’,‘베락바우’ 등이 그 예이다. ㉤ ‘비럭’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비럭골’,‘비럭굴’,‘비럭동’,‘비럭뜸’,‘비럭바구’,‘비럭보’,‘비럭재’ 등이 그 예이다. ㉥ 이밖에도 ‘베루’,‘베리’,‘비링이’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니, ‘베루골’,‘배루들’,‘베루메’,‘베루모퉁이’, ‘베리끝’,‘베리미’,‘베리바우’,‘베리산’,‘베리재’,‘비링이들’ 등이 그 예이다. 따라서 본 예 ‘베루재’는 ‘벼랑으로 되어 있는 고개’로 풀이된다. 달리 ‘베루재고개’로도 불리는데, 이는 ‘고개’의 뜻을 가진 ‘재’에 ‘고개’가 중복된 유의중복 어형이다. ‘연현’은 ‘베루재’의 ‘베루’를 ‘벼루[硯]’로 잘못 이해하여 한자 ‘연(硯)’으로 표기한 이름이다. ‘서낭당베루재’는 이 고개에 서낭당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그러나 본 예는 이곳에서 벼루돌을 채취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어, 벼루돌과 관련되는 이름으로 볼 수도 있다. 베루재골 : ‘괴정저수지’에서 ‘베루재고개’에 이르는 골짜기이다. ‘베루재골’은 ‘베루재’와 ‘골’로 나뉘며, ‘베루재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베루재들 : ‘둥구머리’에서 ‘괴정저수지’에 이르는 들이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 노하리(老下里)의 ‘硯峙坪/베루?’로 기록되어 있다. ‘베루재들’은 ‘베루재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앞들 : ‘둥구머리’ 북쪽에 있는 들판이다. ‘베루재들’ 남쪽에 있다. ‘앞들’은 ‘앞’과 ‘들’로 나뉘며, ‘앞쪽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응골 : ‘베루재들’ 북쪽에 붙어 있는 골짜기이다. ‘응골’은 ‘은골’의 ‘연구개음화형’이다. 전국적으로 ‘은골’은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전부요소 ‘은’은 다양하게 해석된다. 첫째는 ‘은(銀)’과 관련시켜, ‘은을 캤던 골짜기’로 해석된다. 둘째는 ‘은(隱)’과 관련시켜, ‘숨은 골짜기’로 해석된다. 셋째는 ‘숨은’에서 ‘숨’이 생략된 것으로 보아, 역시 ‘숨은 골짜기’로 해석된다. 실제로 ‘은골’과 ‘숨은골’,‘숨어골’이 함께 쓰이는 곳도 있다. 이상으로, ‘은골’의 어원이 매우 다양하게 분석됨을 살펴보았다. ‘은골’은 은을 캤던 역사가 특별히 없다면, 둘째와 셋째 의미와 관련시킬 수 있다. 따라서 ‘은골’이나 ‘응골’은 ‘잘 보이지 않게 숨어 있는 골짜기’ 정도로 풀이된다. 풀무골 : ‘괴정저수지’에서 ‘베루재고개’로 오르는 골짜기이다. ‘풀무골’은 ‘풀무’와 ‘골’로 나뉜다. ‘풀무’는 불을 피울 때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이다. 따라서 ‘불무골’은 ‘풀뭇간[대장간]이 있는 골짜기’로 해석된다. 지역에 따라서는 ‘풀무’의 중세국어 ‘불무골’로 나타나기도 하고. 한자 지명 ‘야동(冶洞)’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호랑이콧등바위 : ‘괴정저수지’ 북쪽, ‘베루재고개’로 가는 쪽에 있는 바위이다. ‘호랑이콧등바위’는 ‘호랑이콧등’과 ‘바위’로 나뉘며, ‘호랑이의 콧등처럼 생긴 바위’로 풀이된다.

[ 문화재 ]

기성전(箕星殿) : 노암1리 ‘행갈’에 있는 사당이다. 이 사당은 은태사(殷太師) 기자(箕子)의 영정(影幀)을 모신 사당으로, ‘기성사(箕星祠)’ 또는 ‘기자영당(箕子影堂)’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평양과 함흥 등에서 기성전을 건립하고 기자를 제향했다. 도안면 노암1리에 살던 한학자 한응각(韓應珏: 1866~1929)은 청주한씨(淸州韓氏)가 기자의 후손임을 믿고 매년 봄,가을로 평양과 함흥에 있는 기자묘(箕子廟)에 가서 참배했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어 참배에 어려움이 많으므로 한응각은 1914년에 도안면 노암1리 ‘행갈’ 159번지에 ‘기성전’을 지어 모사한 기자영정을 모시게 되었다. 당시 함흥 유림들이 향화(香火)를 끊지 말라며 기념나무로 향나무 다섯 그루를 희사해 기성전 뒤 동산에 심었는데 지금도 그때 심은 향나무가 전해지고 있다. 건물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팔각지붕 목조기와집이고, 솟을 대문에 담장을 둘렀다. 그 앞에는 홍살문(紅箭門)을 세웠으며, 1922년과 1969년에 증수(增修)했다. 영정은 가로 0.415m,세로 0.935m의 설채지본(設彩紙本)으로 평정건(平頂巾)을 쓰고 있다. 영정 오른쪽 아래에 ‘김이삼 봉증(金貳參 封贈)’이라는 묵서(墨書)가 있는 것으로 미뤄 김이삼이 모사(模寫)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성전 관리는 한종규 씨가 하고 있다. 해마다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 근처의 유생들과 함께 제향했으며, 이때 시회(詩會)를 열어 학문을 논하면서 학문이 뛰어난 학자를 불러와서 기자의 교민(敎民) 8조(條)를 강의했다고 한다. 지금도 근처의 유림들이 봄과 가을에 제향을 올리고 있으며, 입구에는 1991년 3월에 세운 안내 간판이 있다. 2004년 4월 30일에 증평군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행갈’에는 ‘기성전(箕星殿)’과 관련된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본래 ‘진등’으로 나가는 동구 밖에 있었으나, 1971년에 도안역으로 가는 ‘행갈고개’가 새마을사업으로 확장되면서 ‘기성사’ 부근으로 옮겨졌다. ‘하마비(下馬碑)’는 마을을 찾아올 때 여기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와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석이다. 하마비의 높이는 76cm, 너비 40cm로 전면에 한자로 ‘하마비(下馬碑)’라고 쓰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