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의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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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면

칠송과 소강정의 이름을 딴 자연촌

송정리 (松亭里)

[ 연혁 ]

송정리는 본래 조선시대 청안현(淸安縣) 북면(北面) 지역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 기록에는 청안현 북면에 33개리가 있었다. 그 중에서 현재의 송정리와 관련된 마을로는 전원리(錢院里)ㆍ월로리(月老里)ㆍ칠송정리(七松亭里)ㆍ입장리(笠長里)ㆍ탑동리(塔洞里)ㆍ법곡리(法谷里)ㆍ칠정리(七井里)ㆍ노고곡하리(老顧谷下里)ㆍ가정리(佳停里) 등 9개리가 있었다. 그 뒤 송정리는 건양(建陽) 원년(1895)에 청안현(淸安縣)이 청안군(淸安郡)으로 승격되면서, 청안군의 6개면인 읍내면(邑內面)ㆍ동면(東面)ㆍ남면(南面)ㆍ북면(北面)ㆍ서면(西面)ㆍ근서면(近西面) 중에서 북면(北面)에 속하는 지역이 되었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서도 당시 청안군 북면은 33개리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 사이 칠송정리(七松停里)가 칠송리(七松里)로, 입장리(笠長里)가 입장리(立長里)로, 월로리(月老里)가 월강리(月江里)로, 가정리(佳停里)가 가정리(柯亭里)로, 전원리(錢院里)가 전당리(錢塘里)로, 노고곡하리(老顧谷下里)가 노하리(老下里)로 바뀌었으며, 탑동리(塔洞里)ㆍ법곡리(法谷里)ㆍ칠정리(七井里)가 사라지는 대신 소강정리(小江亭里)ㆍ비석리(碑石里)가 새로 생겼다. 1914년에 일본제국주의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도안면(道安面)은 7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그리고 송정리가 당시의 면소재지였다.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에 따르면, 송정리는 북면 칠송리(七松里)ㆍ입장리(立長里)ㆍ소강정리(小江亭里)ㆍ월강리(月江里)ㆍ가정리(柯亭里)ㆍ전당리(錢塘里)ㆍ노하리(老下里)ㆍ비석리(碑石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만들었다. 이때 칠송리와 소강정리의 이름을 따서 송정리라고 하고, 괴산군 도안면에 편입하였다. 광복 이후 1948년 8월 15일에 정부가 수립되고, 동년 11월 17일에 법률 제8호 「지방 행정에 관한 임시 조치법」이 제정ㆍ공포됨에 따라 괴산군 도안면 송정리가 되었다. 1990년 12월 31일에 충청북도조례 제1864호에 의거하여 괴산군 도안면에서 충청북도증평출장소(忠淸北道曾坪出張所)로 바뀔 때, 송정리는 도안지소(道安支所) 관할이었다. 2003년 5월 29일에 법률 제6902호 「증평군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고, 부칙에 따라 3개월 뒤인 2003년 8월 30일에 증평군(曾坪郡)이 공식 설치되어 증평군 도안면 송정리가 되었다.

[ 유래 ]

송정리는 1914년에 칠송리(七松里)의 ‘송(松)’자와 소강정리의 ‘정(亭)’자를 따서 만들었다. 송정리는 도안면의 제일 북단 음성군 경계와 접하고 있는 마을이다. 2010년 5월 현재 168세대에 380명이 거주하고 있다.

  • 송정1리(松亭一里) : ㆍ입장(立場) : ‘입장’은 송정리 내에서도 가장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에는 ‘입장리(笠長里)’로,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과와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입장(立長)’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옛 족보들에는 ‘입장(立場)’으로 쓰인 예를 발견할 수 있으니, ‘입장’에 대한 한자표기가 ‘立場>笠長>立長’ 등으로 변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전에 장이 형성되었다는 유래와 연관 지어 보면, ‘입장(立場)’이라고 쓰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생각된다. 마을 앞으로는 마을 북쪽에 있는 ‘절터골’과 ‘배티골’에서 발원한 물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마을 뒤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동막골’ㆍ‘점골’ㆍ‘입장골’ㆍ‘청려골’ 등 여러 골짜기에서 발원한 물과 합하여 송정천을 이루어 흐른다. ‘입장’은 ‘청려골’ㆍ‘점골’ㆍ‘동막골’ㆍ‘은목골’ㆍ‘배티골’ㆍ‘절터골’ 등 여러 골짜기가 마을을 에워싸고 있어 아늑하고 포근하다. 또한 그 오랜 옛날부터 ‘입장고개’ㆍ‘배티고개’ㆍ‘다락고개’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으니 항상 사람들로 넘쳐나던 곳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장이 형성되어 ‘입장’이라 불리게 된 것 같다. 또한 마을 동쪽 산에 수령이 400년 이상 된 느티나무가 있어 이 마을의 역사를 말해 준다. ‘입장’은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위쪽[북쪽]에 있는 ‘윗말’과 아래쪽[남쪽]에 있는 ‘아랫말’로 나뉜다. 개바위골/구암골(狗岩-) : ‘송정저수지’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개바위골’은 ‘개바위’와 ‘골’로 나뉘며, ‘개 모양의 바위가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이곳에는 마치 개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달리 ‘구암골’로도 불리는데, 이는 ‘개바위골’의 ‘개바위’를 한자로 표기한 이름이다. 고리안 : ‘은목골’ 다음에 있는 골짜기이다. ‘고리안’은 ‘고리’와 ‘안’으로 나뉜다. 마을 사람들의 전언에 따르면, 골짜기가 길어 붙은 이름이라고도 하고, ‘고리’를 ‘환(環)’의 뜻으로 보아 지형이 고리와 같이 둥그렇게 둘러싼 것 같아서 붙은 이름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고리안’을 달리 풀이할 수 있다. ‘고리안’은 ‘골안’에 속격의 ‘의’가 개재된 ‘골의안’의 변화형이거나, ‘골안’에 조음소 ‘으’가 개재된 ‘고르안’의 모음변화형일 가능성이 있다. ‘골안’은 ‘골짜기의 안쪽’이라는 뜻이니, ‘고리안’도 그와 같은 의미를 띤다. 다락고개 : ‘입장’에서 동남쪽 ‘통미’의 ‘구렛들’로 가는 낮은 고개인데, 현재는 밭이 되었다. 주민들의 전언에 따르면, 옛날 이곳에 최 부자가 높은 누각을 짓고 살아 붙은 이름이라 한다. 그러나 ‘다락고개’를 달리 풀이할 수 있다. ‘다락고개’는 ‘다락’과 ‘고개’로 나뉜다. 여기서 ‘다락’은 ‘달’과 관련된다. 즉 ‘달’에 ‘아’가 개재되어 ‘다라’가 되고, 다시 사이시옷이 개재되어 ‘다랏’이 된 다음, 미파화와 자음 동화가 일어나 ‘다락’이 된 것이다. 지명에서 ‘달(達)’이나 ‘덕(德)’은 ‘높다[高]’나 ‘산(山)’을 뜻한다. 따라서 ‘다락고개’는 ‘산 고개’나 ‘높은 곳에 있는 고개’로 풀이된다. ‘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연탄2리 ‘다람절이골’을 참고하기 바란다. 동막골(洞幕-) : ‘입장골’ 북쪽으로 왼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동막골’(東幕洞)은 ‘점골’ 다음에 있는 골짜기 이름이다. ‘동막골’은 ‘동막’과 ‘골’로 나뉜다. ‘동막’은 ‘동막(洞幕)’으로 보아 ‘막을 친 것처럼 산이 둘러싸고 있는 골짜기’나, ‘동막(東幕)’으로 보아 ‘동쪽이 막을 친 것처럼 산이 둘러싸고 있는 골짜기’로 풀이한다. 여기서는 전자로 해석하여 ‘동막골’은 ‘막을 친 것처럼 산이 둘러싸고 있는 골짜기’로 풀이한다. 이곳은 동쪽이 트여있고, 움막이 있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없다. 배티골 : ‘입장방죽’에서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 방면 산림도를 따라 있는 골짜기이다. ‘배티골’은 ‘배티’와 ‘골’로 나뉘며, ‘배티고개 근처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배티고개 : ‘배티고개’는 ‘배티골’에 있는 고개이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梨峴/?틔’로 기록되어 있다. ‘배티고개’는 ‘배티’와 ‘고개’로, ‘배티’는 다시 ‘배’와 ‘티’로 나뉜다. 여기서 ‘배’는 ‘배나무’를, ‘티’는 ‘고개’를 뜻한다. 따라서 ‘배티’는 ‘배나무가 있는 고개’로 풀이된다. ‘배티고개’는 ‘티’의 뜻이 불분명해지자 ‘티’의 유의어 ‘고개’를 덧붙인 유의중복 어형이다. 과거 이곳에는 배나무 고목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고개를 지나면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助村里)이니, 예부터 음성군 원남면(遠南面) 사람들이 이 고개를 통하여 증평ㆍ청주로 많이 오고 갔다. 그러나 1997년에 임도가 나면서 현재는 자동차로 쉽게 넘나들 수 있게 되었다. 송정저수지(松亭貯水池)/입장방죽(立場-) : ‘입장’ 북쪽에 있는 저수지로, 1938년 준공되어 현재까지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현재 준설공사 중에 있다. ‘송정저수지’는 ‘송정’과 ‘저수지’로 나뉘며, ‘송정리에 있는 저수지’로 풀이된다. 달리 ‘입장방죽’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입장에 있는 방죽’으로 풀이된다. 송정제방(松亭堤防) : 송정리에 있는 둑으로, 길이가 700m 정도이다. ‘송정제방’은 ‘송정’과 ‘제방’으로 나뉘며, ‘송정리에 있는 제방’으로 풀이된다. 은목골 : ‘동막골’ 다음에 있는 골짜기이다. 주민들의 전언에 따르면, ‘은목골(隱牧谷)’은 ‘목동이 숨을 만한 골짜기’라는 뜻이라 한다. 그러나 이를 달리 풀이할 수도 있다. ‘은목골’은 ‘은목’과 ‘골’로, ‘은목’은 다시 ‘은’과 ‘목’으로 나뉜다. 여기서 ‘목’은 ‘통로 가운데 다른 곳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중요하고 좁은 곳’을 뜻한다. 그러나 전부요소 ‘은’은 다양하게 해석된다. 때로는 ‘은(銀)’과, 때로는 ‘은(隱)’과, 마지막으로는 ‘숨은’에서 ‘숨‘이 생략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목’과 관련시켜 볼 때, 첫째보다는 둘째나 셋째 의미와 관련되어 보인다. 그렇다면 ‘은목골’은 ‘산이 사방으로 둘러싸여 마치 숨어 있는 듯이 보이는 길목 근처의 골짜기’로 풀이된다. 입장고개(立場-) : ‘입장’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입장골’이 있는데, 이곳에 있는 고개이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입장리(立長里)’에 ‘立長峙/입장고?’로 기록되어 있다. 이 고개는 광산김씨 세거지였던 연촌리 ‘안베루재’와 매우 가까워 옛날부터 ‘연촌’과 ‘입장’ 사람들이 많이 오가던 곳이다. 때로는 두 마을 친척들이 이 고개를 통해 선조의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한밤중에 넘던 고개이기도 하다. 임도가 나면서 자동차로 넘나들 수 있게 되었다. 입장골(立場-) : ‘점골’ 다음에 있는 골짜기다. ‘증골’에서 북쪽으로 ‘입장방죽’에 이르는 골짜기이다. ‘입장골’은 ‘입장’과 ‘골’로 나뉘며, ‘입장에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절골 : ‘입장방죽’에서 ‘배티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절골’은 ‘절’과 ‘골’로 나뉘며, ‘절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해방 전까지 작은 암자가 있었는데 절에 빈대가 많아 절을 불태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절터골 : ‘송정저수지’ 위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절터골’은 ‘절터’와 ‘골’로, ‘절터’는 다시 ‘절’과 ‘터’로 나뉜다, 따라서 ‘절터골’은 ‘절터가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옛날에 절이 있었으며, 음성군 원남면 조천리와 경계가 된다. 점골(店) : ‘청려골’ 다음에 있는 골짜기이다. ‘점골’은 ‘점’과 ‘골’로 나뉜다. ‘점(店)’은 ‘토기나 철기를 만드는 곳’이다. 따라서 ‘점골’은 ‘토기나 철기를 만드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이곳은 과거에 사기를 굽던 곳이다. 증골[店-] : ‘윗말’ 위의 연촌리로 가는 골짜기이다. ‘증골’은 ‘점골’의 변화형이다. ‘점골’에서 ‘ㅓ’가 ‘ㅡ’로 변해 ‘즘골’이 되고, ‘즘골’이 연구개음화에 의해 ‘증골’이 된 것이다. 따라서 ‘점골’이나 ‘즘골’ㆍ‘증골’은 ‘사기점이 있는 골짜기’로 풀이된다. 청려골[昌寧-]/청녁골[昌寧-] : ‘윗말’과 ‘아랫말’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골짜기가 맑고 아름답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하는데, ‘청려골’의 원 지명은 ‘창령골[昌寧洞]’이다. 창성하고 편안한 곳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창령골’이 발음상 어렵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창려골’로 불리다가 ‘청려골’로 굳혀진 듯하다. 풀무골/풍무골 : ‘입장’에서 ‘괴정저수지’로 가는 골짜기이다. ‘풀무골’은 ‘풀무’와 ‘골’로 나뉜다. ‘풀무’는 불을 피울 때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이다. 따라서 ‘불무골’은 ‘풀뭇간[대장간]이 있는 골짜기’로 해석된다. 지역에 따라서는 ‘풀무’의 중세국어 ‘불무골’로 나타나기도 하고. 한자 지명 ‘야동(冶洞)’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달리 ‘풍무골’로도 불리는데, 이는 ‘풀무골’의 변화형이다.
  • 송정2리(松亭二里) :ㆍ통미[桶-]/통뫼(桶-)/통메(桶-)/칠송(七松)/칠송정(七松亭) : ‘통미’는 ‘종지붕’에서 시작한 산줄기 끝에 형성된 마을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에는 ‘칠송정리(七松亭里)’로,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는 ‘칠송(七松)’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七松/통뫼’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부르거나 쓰는 이름 모두 ‘칠송’보다는 ‘통미’라는 이름을 주로 사용한다. ‘통미’는 ‘통’과 ‘미’로 나뉜다. 여기서 ‘통(桶)’은 ‘어떤 물질을 담을 수 있도록 나무ㆍ금속ㆍ플라스틱 등으로 깊이가 있게 만든 물건’을 뜻한다. 지명에서 ‘미’는 ‘메’ㆍ‘모이’ㆍ‘뫼’ㆍ‘매’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산(山)’을 뜻한다. 따라서 ‘통미’는 ‘통을 엎어 놓은 듯 동그랗게 생긴 산’으로 풀이될 수 있다. ‘통뫼’나 ‘통메’ 또한 그 뜻이 같다. 이 마을은 중앙에 통(桶)처럼 동그랗게 생긴 산이 있었다. 그러나 동산 뒤쪽으로 개울이 형성되면서 통처럼 생겼던 산이 물에 의해 침식되어 어른도 오르기 힘든 가파른 언덕이 되었다. 그리고 그 언덕에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숲을 이루었다. 그런데 1990년 여름 태풍으로 언덕에 있던 큰 아카시아나무가 쓰러져 언덕 아래 있는 집을 덮칠 위험에 빠졌다. 이후로도 몇 번 이와 같은 일로 위험한 처지에 놓이자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걱정하던 중, 1997년 당시 조영창(趙永昌) 증평출장소장이 마을을 방문했을 때 애로 사항을 얘기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언덕을 개축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곳을 ‘언덕’이라 부른다. 그리고 애초에 이 마을이 ‘통미’에 의지해 형성된 것임을 알기에 남아있는 언덕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가꾸며 위한다. 그 옛날 땔감이 귀했던 때에도 이 언덕에서 나오는 것은 썩은 나뭇가지 하나라도 함부로 가져다 때지 않았으며, 언덕고사를 지내며 마을의 발전과 평화를 기원하였다. ‘통미’는 달리 '칠송(七松)' 또는 ‘칠송정(七松亭)’으로 부른다. 이는 현재 ‘언덕’이라고 부르는 동산에 일곱 그루의 소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예전의 소나무는 없어졌지만, 주민들은 지명 유래를 생각하여 일곱 그루의 소나무를 다시 심어 ‘칠송’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통미’는 마을 중앙으로 흐르는 작은 개울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로 나뉜다. 그리고 동쪽을 특별히 ‘가장리’로 부르고 있다. ‘가장리’는 ‘통미’ 중에서도 개울 가장자리 쪽에 있는 몇몇 집들을 한정지어 부르는 말이다. 지명에서 ‘가장’은 단독으로 쓰이기도 하고, ‘가장개’ㆍ‘가장걸’ㆍ‘가장고래’ㆍ‘가장곡’ㆍ‘가장골’ㆍ‘가장굴’ㆍ‘가장꼬지’ㆍ‘가장논’ㆍ‘가장동’ㆍ‘가장들’ㆍ‘가장리’ㆍ‘가장마루’ㆍ‘가장말’ㆍ‘가장매’ㆍ‘가장머리’ㆍ‘가장모랭이’ㆍ‘가장미’ㆍ‘가장산’ㆍ‘가장올’ㆍ‘가장터’ㆍ‘가장판’에서와 같이 전부요소로 쓰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때 ‘가장’은 대부분 ‘가장(假葬)’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지명에 나타나는 ‘가장’은 중세국어 ‘?[邊]’에 기원하는 것으로, ‘가장자리[邊]’를 뜻한다. 그 위치가 중앙에서 벗어난 가장자리라는 특징을 갖는다. 따라서 ‘가장리’는 ‘가장자리에 있는 마을’로 풀이된다. ‘통미’의 성씨별 분포는 곡산연씨 안음공파ㆍ눌문파 후손들이 가장 많고, 그 외에 전주이씨, 광산김씨 등이다. 이 외에도 많은 성씨가 함께 살고 있다. 곡산연씨가 이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된 것은 곡산연씨 안음공파의 파조인 연충수(延忠秀, 1557~1621)로부터 비롯된다. 그가 부 연정우(延定宇)와 조부 연정(延?, 1486~1548)이 살던 도안면 화성리 ‘명암(鳴岩)’에서 이곳 ‘통미’로 이거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400년 전의 일이다. 그의 묘소는 현재 ‘통미’ 뒤 ‘법곡(法谷)’에 있으며, 바로 아래로는 그의 아들 연심(延瀋)의 묘소가 있고, 그 아래에는 영조 31년(1755)에 대사헌 겸 세자찬선을 지낸 민우수(閔遇洙, 1694~1756)가 지은 묘갈이 있다. 전주이씨가 이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된 것은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 이여(李璵, 1425~1444)의 8세손인 이중빈(李重彬, 1618~1695)으로부터 비롯된다. 그의 묘소는 본래 송정1리 ‘입장’에 있었는데, 그 후 천묘하여 현재는 송정2리 ‘통미’의 ‘샘골’에 있다. 이중빈이 송정리에 입향한 비슷한 시기에 그의 형 이중재(李重材, 1613~1671)는 도안면 화성1리에 입향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들 이익망(李翼望, 1640~1713)과 이동망(李東望, 1649~1709)은 화성리에서 이곳 송정리로 이거하여 각각 ‘통미’와 ‘월강’에 와서 살았다. 이처럼 현재 ‘통미’에 살고 있는 전주이씨 광평대군파 후손들은 이중빈이 송정리에 입향한 이후이니, 지금으로부터 대략 370년 전의 일이다. 광산김씨 직제학공파의 후손들이 이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된 것은 광산김씨 세거지였던 연촌리 ‘안베루재’에서 ‘통미’로 이거한 때부터이다. 더러는 연촌리에서 송정1리 ‘입장’을 거쳐 다시 그 아래 마을인 ‘통미’로 분가하기도 했으니, 지금으로부터 대략 200년 전의 일이다. 이 마을은 마을 단위의 집단신앙으로 ‘언덕제[丘祭]’를 지낸다. 매년 지내는 것은 아니고 대개 3년마다 1번씩 지낸다. 마을 회의를 통해 ‘언덕제’의 날짜가 정해지면 제일(祭日)을 며칠 앞두고 마을 중앙에 있는 언덕에 왼새끼를 꼬아 금줄을 친다. 이 ‘언덕제’의 유래는 마을의 생성과 관련되어 있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무술년[1700년경]에 큰 홍수가 나서 마을이 모두 떠내려가고 언덕만 남게 되었다. 그때부터 마을에서 ‘언덕제’를 지내기 시작했는데, 1997년경 제사가 중단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지낸다. ‘통미’의 제사 대상이 되는 언덕은 마을의 가운데에 있는 나지막한 구릉으로, 팽나무와 버드나무 등이 있는 곳이다. 이 나무들은 제사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모내는 시기를 점치는 데 이용되기도 한다. 즉 버드나무 잎이 밑에서 필 때는 모내는 시기를 조금 앞당기고, 버드나무 잎이 꼭대기에서 나올 때는 모내는 시기를 조금 늦춘다. 제주(祭主)를 선정하는 방법은 생기 복덕(生氣福德)에 따라 결정하는데, 초헌관(初獻官)ㆍ아헌관(亞獻官)ㆍ종헌관(終獻官) 순으로 정한다. 그 외 대축(大祝)ㆍ집례(執禮)ㆍ전작(奠酌)ㆍ봉작(奉酌)을 결정한다. 제의는 유교식으로 진행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한복을 입고 참가한다. 제물로는 백설기 1시루ㆍ시루떡 1시루[시루의 양 옆에 통북어 각각 1관리씩 꽂음]ㆍ삼색실과ㆍ북어포ㆍ돼지머리ㆍ사과ㆍ배ㆍ옥춘당 등의 과자류 등이 진설된다. 또 상 위에는 각 가정에서 가져다 놓은 ‘불밝이쌀’이 놓여진다. 유교식 제의 절차에 따라 축문을 읽고 초헌관ㆍ아헌관ㆍ종헌관이 차례로 잔을 올린 다음 대주(大主)가 전작할 사람들 순서대로 잔을 올리게 한다. 그런 후 대표가 ‘언덕신’에게 먼저 소지를 올린 후 마을 사람들도 저마다 소지를 올린다. 제비(祭費)는 마을의 공동기금과 집집마다 각출한 곡식을 모아서 충당한다. ‘통미’의 ‘언덕제’에서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사실은 제관을 뽑고 제물을 다루는 일과 금기 사항을 지키는 일이 예전에 비해 많이 약해졌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통돼지를 잡아 제사가 시작되기 전에 마을 사람들이 함께 먹는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언덕신’에게 올리기 전에 먼저 마을 사람들이 함께 먹는 일도 생겼다. 이와 같은 일은 ‘언덕제’의 의미가 종교적인 차원에서 점차 마을 화합과 같은 기능적 차원으로 변화되는 추세를 보여주는 예이다. ‘언덕제’의 축문은 다음과 같다.
  • 송정3리(松亭三里) : ㆍ월강(月江) : ‘월강’은 도안면사무소에서 북쪽으로 2km 거리의 36번국도 왼쪽에 있다. ‘월강’은 들판 가운데 있는 마을로, ‘입장’에서부터 시작하여 ‘통미’를 거쳐 흐르는 내[川]가 마을 앞으로 흐른다. 내 옆에는 둥그런 자연석에 ‘월강(月江)’이라 새긴 표지석이 있고, 마을 뒤로는 충북선 철도가 지나간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에 ‘월로리(月老里)’라고 기록되어 있다. ‘월로(月老)’란 ‘월하노인(月下老人)’을 가리키는 말로, 남녀의 인연을 맺어주는 ‘신인(神人) 중매쟁이’를 뜻한다. 어떤 까닭에 ‘월로리(月老里)’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는 확인할 수는 없다. 아무래도 월강’에 좋은 중매쟁이가 살았거나, 아니면 이 근방에서 자주 혼담이 오고 갔던 마을이라 그렇게 불렀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는 ‘월강’이라 하였으니 대부분 다른 마을이 그렇듯이 이 마을도 일제 강점 하에 ‘월로리’에서 ‘월강’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월강’으로 부르게 된 데에 있어서도 몇 가서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이 마치 달과 같은 모양이라 해서 붙은 것으로 믿고 있다. 뗏집거리/뗏주막거리(-酒幕-) : ‘월강’ 뒤로 충북선 철도가 지나가고, 그 철도 너머에 있던 마을이다. 광복 이전까지만 해도 4∼5가구가 있었지만, 1981년에 충북선 철도 복선공사를 하면서 사라졌다. 이 마을에 있던 집들이 떼로 토담을 쌓아서 지었다고 하여 ‘뗏집거리’라고 불렀다. 또한 이곳에 주막이 있어서 ‘뗏주막거리’라고도 불렸다. 바깥때기들 : ‘월강’에서 철로와 청주∼충주 간 36번국도 건너편 경작지이다. ‘바깥때기들’은 ‘바깥때기’와 ‘들’로 나뉘며, ‘바깥때기’는 다시 ‘바깥’과 ‘때기’로 나뉜다. ‘때기’는 ‘뙈기’의 변화형으로, ‘경계를 지어놓은 논밭의 구획’을 뜻한다. 따라서 ‘바깥때기들’은 ‘마을 바깥에 있는 논밭의 들’로 풀이된다.
  • 송정4리(松亭四里) : ㆍ소강정(小江亭) : ‘소강정’은 36번국도에서 ‘통미’로 가는 들판 가운데 있는 마을이다. 마을 옆에는 ‘연암골’에서 발원한 물이 흐른다. 이 물은 다시 ‘배티골’과 ‘절터골’에서 발원하여 ‘월강’ 앞으로 흐르는 물과 합쳐 ‘가무지’를 지나 석곡리로 흐른다. 마을 뒤로는 낮고 평평한 산이 있으며, 마을 입구에는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있어 뜨거운 여름날에 땀을 식히기에 족하다. ‘소강정’은 송정리에서 가장 늦게 생긴 마을이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에는 이 마을과 관련된 이름이 없으나,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과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 ‘소강정(小江亭)’이 처음 등장한다. ‘소강정’에 처음 정착한 이는 곡산연씨 눌문파(訥文派)의 파조 연예수(延禮秀)의 11세손인 연봉준(延鳳峻, 1852~1902)이다. 한학자 연봉준은 화성리 ‘성도리’에 살다가 약 140여 년 전에 이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왔다. 그는 큰 부자로 살면서 마을 앞 물가에 정자를 지었다. 그리하여 붙은 이름이 ‘소강정’이라는 것이다. 마을에는 ‘연암산계’라는 산림계가 1950년에 조직되어 있다. 이 계는 송정3리 ‘월강’ㆍ송정4리 ‘소강정’ㆍ송정5리 ‘가무지’ㆍ노암리ㆍ석곡1리 사람들이 함께 조직한 것으로, 관리자를 ‘상감’이라 불렀다. 계원과 비계원을 구분하기 위해 나무를 하러 갈 때에는 반드시 지게에 이름표를 붙이고 산에 들어갔다 한다. 가정리(佳亭里, 柯亭里)/가정골(佳亭-) : ‘소강정’ 서쪽에 있던 마을이다. ‘연암저수지’ 옆에 있던 ‘칠정리’와 함께 역사가 오래 된 마을이었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에는 ‘가정리(佳亭里)’로,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는 ‘가정(柯亭)’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柯亭/가졍골’로 기록되어 있다. ‘가정리’는 1979년 현재의 송정5리인 ‘새동네’가 ‘소강정’ 옆에 새로 생길 때만 해도 4호 정도가 있었다. 그 후 남아 있던 4호가 ‘새동네’나 다른 마을로 떠나가면서 ‘가정리’라는 마을은 없어졌다. 현재 마을이 있었던 자리는 농경지로 변했다. ‘가정리’에서 ‘가정’을 ‘가정(佳亭)’으로 보면 ‘아름다운 정자가 있는 마을’로, ‘가정(柯亭)’으로 보면 ‘모밀잣밤나무 정자가 있는 마을’로 풀이된다. ‘소강정’과 관련하여 풀이하면 아마도 전자가 맞을 것 같다. 달리 ‘가정골’로도 불리는데, 그 뜻은 ‘가정리’와 같다. 모밀잣밤나무는 참나뭇과의 상록 활엽 교목으로, 높이가 10∼15m이며, 지름이 1m이다. 잎은 어긋나며, 두 줄로 배열하고, 넓은 피침형 또는 타원상 피침형이며, 잔 인모(鱗毛)로 덮였다. 꽃은 자웅동주로, 6월에 핀다. 바가지샘 : 마을회관 옆 양지쪽에 있는 샘이다. ‘바가지샘’은 두레박 대신 바가지를 사용하는 샘이다. 이 샘은 호랑이[산신령]가 찾아 준 것이라 한다. 따라서 물맛이 좋기로 소문이 났었고,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에 집이 한 둘 늘어나면서 식수를 구하려고 마을 여러 곳을 파 보았으나, 물을 구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처음에는 마을 앞에 있는 냇물을 길어다 먹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눈이 많이 쌓였는데 지금의 회관 옆 양지쪽에 호랑이가 내려와 둥글게 원을 그려놓고 갔다. 마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눈이 녹은 후 그 자리를 파보니 물맛이 참으로 좋아 인근 마을까지 소문이 났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산신령이 잡아준 샘이라 하여 주변을 깨끗이 하며 식수로 사용하여 왔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뚜껑을 덮어 놓았다. 비링이들/봉천답(奉天畓) : ‘소강정’ 서쪽에 있는 들이다. ‘비링이들’은 ‘비링이’와 ‘들’로 나뉜다. ‘비링이’는 ‘비렁이’의 변화형으로 추정된다. ‘비렁이’는 ‘비렁뱅이’의 방언으로, ‘거지를 얕잡아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비링이들’은 ‘비렁뱅이들’, 즉 ‘비렁뱅이가 될 만큼 소출이 적은 들’로 해석된다. 그러나 ‘비렁이’를 ‘벼랑’의 중세국어인 ‘비레’와 관련시킬 수도 있다. 지역에 따라서는 ‘비렁이’가 ‘벼랑’의 방언형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비링이들’은 ‘비렁이들’ 즉, ‘벼랑으로 되어 있는 들’로 풀이된다. 이 들은 물이 귀해서 땅이 몹시 척박했다. 물이 귀하다면 높은 곳일 수 있다. 그렇다면 후자의 의미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들은 달리 ‘봉천답’으로도 불린다. ‘봉천답’은 ‘빗물에 의해서만 벼를 심어 재배할 수 있는 논’으로, ‘천둥지기’ㆍ‘봉답(奉畓)’ㆍ‘천봉답(天奉畓)’ㆍ‘천수답(天水畓)’ㆍ‘하늘바라기’로도 불린다. 이곳은 메마른 들이었으나, 현재는 저수지 시설로 수리안전답이 되었다. 유하노인정(柳下老人亭) : ‘소강정’에 있는 노인정이다. 1980년에 지었는데, ‘소강정’ㆍ‘월강’ㆍ‘가무지’ 세 마을이 함께 사용한다. 마을 옆으로 작은 내가 흐르고, 그곳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가 있다. 이 버드나무 아래 노인정을 지은 까닭에 ‘유하노인정(柳下老人亭)’이라 부른다. 종중뫼(宗中-) : ‘소강정’ 뒷산이다. ‘종중뫼’는 ‘종중’과 ‘뫼’로 나뉘며, ‘종중산’으로 풀이된다. ‘종중’은 ‘성이 같고 본이 같은 한 겨레붙이의 문중’을 뜻한다. 이 산에는 종중의 묘가 많이 있다. 질버드기들 : ‘소강정’ 서북쪽에 있는 들로, 노암4리 ‘괴정’ ‘베루재들’과 붙어 있다. ‘질버드기들’은 ‘질번데기들’의 변화형이다. ‘질번데기들’은 ‘질번데기’와 ‘들’로, ‘질번데기’는 다시 ‘질’과 ‘번데기’로 나뉜다. ‘번데기’는 ‘버덩’의 방언형이다. ‘버덩’은 ‘높고 평평하며 나무는 없이 잡초만 우거진 거친 들’을 말한다. 따라서 ‘질버드기들’은 ‘질흙으로 된, 높고 평평하며 나무는 없이 잡초만 우거진 거친 들’로 풀이된다.
  • 송정5리(松亭五里) : ㆍ전원(錢院)/전당(錢塘)/전실(錢室)/가무지 : 소강정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전원’은 본래 들 가운데 형성된 마을로, 마을 중앙으로 36번국도가 나면서 마을이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나뉘어 있다.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에는 ‘전원리(錢院里)’로,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는 ‘전당(錢塘)’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는 ‘錢塘/가무지’로 기록되어 있다. 이 마을을 ‘전원’ㆍ‘전당’ㆍ‘전실’로 부르게 된 유래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모두 ‘돈 전(錢)’자가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부유하고 풍족한 마을이라 하여 그렇게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현재 이런 이름보다는 ‘가무지’라는 이름이 더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가무지’는 약 350년 전에 곡산연씨 눌문파(訥文派)의 파조 연예수의 증손인 연세익(延世益, 1639∼1710)이 입향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가 이 마을에 들어오기 전에는 도안면 화성리 ‘행정’[현 도안초등학교 뒤]에 거주하였다. 마을 사람들의 전언에 따르면, ‘가무지(歌舞地)’는 ‘노래하고 춤추는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라 한다. 연서조(延瑞朝, 1784∼1829)가 벼 천 석을 하며 흉년이 들 때마다 인근의 괴산ㆍ청안ㆍ음성ㆍ진천의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니 순조 29년(1829)에 임금께서 친히 품계를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올리고 첨지중추부사겸오위장(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을 하사하였다. 이렇듯 연서조가 후히 베풀고 사니 청안 고을 현감(縣監)이나 가까운 벗들이 자주 와서 글을 짓고 춤추며 놀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 마을을 ‘가무지’라 불렀다는 것이다. ‘가무지’에 대한 또 다른 유래가 있다. 일본이 한국을 합병하면서 이곳에 도안역ㆍ학교ㆍ주재소ㆍ면사무소 등 신식 기관이 속속 들어서게 되었다. 이유야 어떻든 신식 기관이 들어서게 된 것에 인근 주민들은 좋아했고, 또 ‘잔치를 벌여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러한 것이 연유가 되어 ‘전원’ㆍ‘전당’ㆍ‘전실’이라는 지명이 ‘가무지’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1914년에 일본제국주의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統廢合)할 때 청안군 서면(西面) 진암리(鎭岩里) 일부와 음성군(陰城郡) 원서면(遠西面) 눌문리(訥文里) 일부를 병합하여 화성리(花城里)ㆍ도당리(道塘里)ㆍ석곡리(石谷里)ㆍ광덕리(光德里)ㆍ송정리(松亭里)ㆍ노암리(老岩里)ㆍ연촌리(硯村里) 등 7개리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면(面)이름도 북면(北面)에서 옛 도안현(道安縣)의 이름을 따라 도안면(道安面)으로 고치고, 괴산군(槐山郡)에 편입시켰다. 이때 일본제국주의는 도안면소재지를 ‘가무지’에 두었다. 그러나 이 마을에 있던 면사무소ㆍ지서ㆍ초등학교는 1927년에 충북선이 개통되고 1928년에 도안역이 건립되자 교통을 따라 도안역이 있는 화성리로 이전되었다. ‘가무지’는 1976년에 취락구조 개선사업 시범마을로 선정되어, 1979년에 12호가 송정4리 ‘소강정’ 옆으로 이주하였다. 이렇듯 다시 마을이 나뉘어 ‘구가무지(舊-)’를 ‘가무지’라 하고, 새로 이주하여 12호가 사는 마을을 ‘새동네’ㆍ‘신촌(新村)’이라 부르고 있다. 현재 구 ‘가무지’는 상업지구로, ‘새동네’ㆍ‘신촌(新村)’은 농업지구로 구분되어 생활하고 있다. 데시렁이들 : ‘가무지’와 ‘괴정’ 사이에 있는 들이다. ‘데시렁이들’은 ‘뒤시렁이들’의 변화형으로 추정된다. ‘뒤시렁이들’은 ‘뒤시렁이’와 ‘들’로, ‘뒤시렁이’는 ‘뒤’와 ‘시렁이’로 나뉜다. 여기서 ‘뒤’는 ‘뒤[後]’이고, ‘시렁이’는 ‘시렁’에 접미사 ‘이’가 붙은 어형이다. ‘시렁’은 ‘물건을 얹어 둘 수 있도록 두 개의 긴 나무를 건너질러 선반처럼 만든 것’을 뜻한다. 들’다면 ‘데시렁이들’은 ‘뒤쪽에 있는, 시렁 모양의 들’로 풀이된다. 딴통뫼[-桶-] : ‘가무지’와 석곡리 ‘돌꼬지’ 사이의 들 한가운데 있는 조그만 산이다. ‘딴통뫼’는 ‘딴’과 ‘통뫼’로 나뉜다. 여기서 ‘딴’은 ‘다른’의 방언형이니, ‘딴통뫼’는 ‘다른 통뫼’로 풀이된다. 송정2리 ‘통미’와 대비적으로 붙인 이름으로 추정된다. ‘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증평읍 송산2리 ‘안자산2’를 참고하기 바란다. 비성거리들[碑石-] : ‘가무지’와 ‘새동네’ 사이에 있는 들이다. 충북선이 지나가는 논 경작지이다. ‘비성거리들’은 ‘비성거리’와 ‘들’로, ‘비성거리’는 다시 ‘비성’과 ‘거리’로 나뉜다. ‘비성거리’는 ‘비석거리’의 연구개음화 어형이니, ‘비성거리들’은 ‘비석이 있는 거리 부근에 있는 들’로 풀이된다. 새터샘 : ‘가무지’ 뒤쪽에 있는 우물인데, 현재는 논 가장자리에 있다. 옛날에는 이 우물 하나로 ‘가무지’ 사람들의 식수를 해결했다. ‘새터’는 ‘새동네’와 같은 곳인지? 송정제1교(松亭第一橋) : 송정리 입구에 있는 다리로, 1928년에 놓았다. 길이 7mㆍ폭 4m이다. ‘송정제1교’는 ‘송정리에 있는 첫 번째 다리’로 풀이된다. ‘송정제2교(松亭第二橋)/가무지윗다리[1978년 완공]’와 대비적으로 쓰인 이름이다.

[ 문화재 ]

ㆍ송정리고인돌(松亭里-) : ‘송정리고인돌’은 송정2리 ‘통미’ 355번지의 김정수 씨 집안에 있다. 고인돌이 있는 송정리는 평야지대를 이루며, 마을 동쪽으로는 문암천과 연결되는 소하천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고인돌의 덮개돌은 화강암으로서 평평하고, 두께는 약 35cm 정도로 고르다. 평면 형태는 사다리꼴의 부정형으로, 동북쪽 외면에 땜질한 자국이 보인다. 덮개돌의 크기는 가로 267cmㆍ세로 157cm이고, 높이 34m이다. 남북 방향이 장축(長軸)이며, 고인돌은 거의 없는 듯이 지표에서 조금 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남방식 고인돌로 보인다. 현재 이 집안에서는 여러 가지 일이 있을 때마다 고인돌에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고 있다고 하며, 매년 대(代)를 이어가면서 정월에 고사(告祀)를 지내주고 있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무덤(墓)이다. 이 고인돌은 증평 지역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거석문화재로서 중요한 자료이다. 2004년 4월 30일에 증평군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었다. ㆍ연충수신도비(延忠秀神道碑) : 안음공(安陰公) 연충수(延忠秀: 1557~1621)의 묘소는 송정2리 ‘통미’ 뒤편 골짜기 ‘법곡(法谷)’에 있다. 길 왼쪽에 있는 신도비 비각에서 언덕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그의 묘소와 아들 연심(延瀋)의 묘소가 있다. 그의 신도비는 영조 31년(1755)에 사헌부대사헌겸세자찬선(司憲府大司憲兼世子贊善) 민우수(閔遇洙: 1964~1756)가 짓고 정산현감(定山縣監) 채복휴(蔡復休)가 쓴 것을, 영조 50년(1774)에 세운 것이다. 연충수의 자는 성백(誠伯)이고 곡산인(谷山人)이다. 연정원(延定遠)의 장자로 태어나 자라서는 중부(仲父) 연정우(延定宇)의 계후(繼后)로 나아가니 성효(誠孝)가 두텁고 지극했다. 한강(寒崗) 정구(鄭逑) 선생의 문하에 드나들며 경전을 강습하고 과거보는 일을 일삼지 아니하니 한때 사우(士友)가 모두 공경했다. 그의 나이 36세인 1592년[임진년]에 왜적이 청안을 침범하니 대의(大義)를 떨치어 고향인 청안에서 의병을 모아 왜적을 무찔렀다. 그 이듬해인 1593년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이 되었다가 내첨사주부(內瞻寺主簿)를 거쳐 중림도찰방(重林道察訪)에 제수되었다. 1603년[47세]에 안음현감이 되어 선정을 폈고, 얼마 안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는 벼슬하지 않고 두문(杜門) 강학(講學)하다가 광해군 13년(1621)에 65세로 생을 마감하니 사림과 향인(鄕人)들이 모두 탄식했다고 한다. 연사종(延嗣宗)ㆍ연최적(延最績)ㆍ연세홍(延世鴻)과 함께 도안면 도당1리 ‘금당’에 있는 정후사(靖厚祠, 金塘書院)에 배향되었다. ㆍ송정리분청사기도요지(松亭里粉靑沙器陶窯址) : ‘송정리분청사기도요지’는 송정2리 ‘통미’에 있다. 마을에서 동쪽 농로를 따라 약 800m 정도 가면 정려문이 나오는데, 이 정려문을 지나 계곡 안쪽의 끝부분 서쪽에 있는 민묘 중심이 바로 그곳이다. 이 도요지는 자기편 등이 발견되나 기록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대체로 조선 초기 도요지로 추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발견되는 분청사기편(粉靑沙器片)들은 엷은 회청색의 대접과 접시 등 일반 서민용의 생활용기의 파편들이 대부분이며, 대마디굽 형태와 국화문양 및 연꽃문양 등이 새겨진 것이 많다. 현재 심하게 파괴되어 가마의 원형을 알아 볼 수가 없으나, 구릉을 따라 가마가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 괴산군(槐山郡) 토산조(土産條)에 “자기소일재군남인현리하품도기소일재군남오지현하품(磁器所一在郡南茵峴里下品陶器所一在郡南吾只峴下品)” 즉 “자기소 하나가 군의 남쪽 인현리에 있으니 하품을 생산하고, 도기소 하나가 군의 남쪽 오지현에 있으니 하품을 생산한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인현리에서는 자기(磁器)를, 오지현에서는 도기(陶器)를 중앙에 토산공물로 바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괴산군 분청사기가마는 ‘통미분청사기가마’ 외에도 청천면 사기막리에 6개소, 칠성면 사은리에 1개소가 더 있다.